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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폴리스의 성립- 폴리스의 특징과 식민

by 길반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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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는 소규모의 폴리스의 형태로 존재했다

그리스인은 대체로 기원전 11-10세기까지 씨족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이것은 혈연사회라고 본다. 사회적 단위는 씨족에서 부족 순서로 발전했다. 시민은 군사적, 정치적 목적에 따라 4 부족으로 구분되었다. 각 부족은 문벌로 구분되고 다시 씨족으로 갈렸다. 이러한 집단적 단위를 통해 공동으로 토지를 경작하고 생산물에 대한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자급자족의 경제가 변하기 시작했다. 토지는 균등 분배가 아니라 추첨으로 분배되었다. 그리고 세습하는 사유지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토지의 사유화가 시작되면서 기존의 혈연사회가 막을 내리고 지연 사회로 바뀌어갔다. 그 결과 성립된 것이 바로 폴리스다. 기원전 9-8세기경에 폴리스가 성립되었다. 왕은 사법, 군사, 종교를 관장했다. 고대 동방의 군주는 전제권력으로 강력한 왕권을 지니고 있었지만 폴리스는 달랐다. 각 촌락마다 있는 장로회의가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폴리스는 흔히 도시 국가라고 번역된다. 역사가들은 이것은 적절한 해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시국가는 메소포타미아 시대에서 로마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다. 폴리스란 말은 하나의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을 가리키는 의미를 가진다. 전형적으로 폴리스는 도시 내의 주거지에 모여 사는 사람들도 구성되었다. 폴리스는 시민의 긍지의 대상이었지만 크기는 작은 편이었다. 수백 명에서 많은 폴리스는 20여만 정도의 인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니, 지금의 개념으로 보면 아주 작은 소도시에서 중소도시 정도의 규모로 볼 수 있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책 정치학에서 시민 사이에 직접 만날 수 있는 폴리스의 형태가 이상적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10명이 사는 폴리스는 자급자족하지 못하며 1만 명이 넘는 폴리스는 적당한 자치를 이룰 수 없다고 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5천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폴리스를 말하고 있다. 거의 모든 폴리스가 2만이 넘지 않는 소규모의 공동체였다는 것에 의견이 모이고 있다. 폴리스에는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경 폴리는 성벽을 쌓았다. 성벽 안에는 시민이 살고 외국인은 성벽 밖에 거주했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시민과 외부인을 가른 것이다. 성벽 안에서는 샘물이나 지하 저수지에서 물을 얻을 수 있었다. 폴리스의 한복판에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과 제단, 공공기념물 등이 있었다. 아고라는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이름이다. 아마도 한 때 포털 다음의 한 페이지의 이름으로 자주 들을 이유일 것이다. 아고라는 원래 병사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하지만 점차 정치적인 집회장소가 되어갔다. 폴리스의 영역은 농경지, 방목지, 황무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농민은 매일 아침 도시를 떠나 농토로 일하러 가거나 목축장으로 양이나 염소를 기르기 위해 나갔다가 밤이 되면 돌아왔다. 폴리스는 도시와 농촌을 겸한 생활 공동체였다고 볼 수 있다.  폴리스는 그리스인의 생활 기본 단위였다. 개인생활은 폴리스가 가하는 제약 아래 있었지만 그리스인의 공동체에 대한 애착도 매우 강했다. 폴리스는 그리스 본토에 700개 이상이나 있었다. 지중해와 에게 해의 섬들까지 감안하면 모두 1천 개 이상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많은 폴리스들은 상호 간에 정치적 지배관계가 없는 자주독립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정치적 유대를 맺거나 또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교류했다. 그리스인은 언어, 종교, 관습이 다른 이민족을 야만족이라고 부르며 차별했다. 자신들이 속한 곳을 헬라스라고 불렀다. 스스로 헬렌 신의 후예 헬레네스라고 부르며 문화적 공동 유대와 동족의식을 굳게 다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폐쇄성은 인간의 불안감의 단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들의 세계를 더욱 곤고하게 다지면서 그 안에서 자신들은 잘 가고 있다는 위안을 얻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나의 철학과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세계관은 수많은 유기적 관계를 통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이 최고라고 믿고 싶어 한들 그것은 유기적인 불안정이 발생하는 순간 무너지고 균열이 생기고 만다. 

 그리스 전체에 흩어져 있는 폴리스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라코니아형과 아티카 폴리스가 있다. 라코니아형 폴리스는 농업 중심의 과두제적인 왕정에 머물러 있었다. 아티카 폴리스는 상공업을 주로 영위하며 민주적 개방사회로 발전했다. 기원전 1100-800년 미케네 세계의 붕괴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 세계의 부는 많이 늘었고, 인구 역시 대폭 증가했다. 기원전 8-7세기에는 많은 그리스인이 에게 해의 섬들과 지중해 연안 일대로 조직적으로 이민하였다. 이러한 인구의 해외 이동은 대체로 기원전 750-500년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 같은 식민정책은 결국 폴리스의 대대적 확장을 의미했다. 전 지중해에 그리스 문화가 퍼지는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인이 식민활동을 전개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귀족층에 토지가 집중 독점되어서 영세농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농민들이 새로운 경작지를 찾기 위해 외부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폴리스의 급속한 성장을 원인으로 둘 수 있다. 인구가 많이 증가했으니 이주는 불가피한 문제가 되었다. 폴리스는 번영하고 시장이 확대되었다. 폴리스 안에서 정치적 분열이 일어났다. 다른 뜻을 품게 된 무리는 나가서 또 다른 집단을 형성했을 것이다. 새로 이민 간 지역의 그리스인은 농민, 공인, 상인으로 정착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지배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새로 생긴 폴리스는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식민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폴리스는 독립 국가며 본토의 어떤 폴리스도 정치적으로 예속되지 않았다. 새로 생긴 식민 폴리스들은 본토 폴리스들과 부단한 경제 교류를 했다. 기존의 제도와 관습, 종교를 보존하며 폴리스 사이의 유대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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