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고대문명은 기원전 18세기경 지중해 및 소아시아의 여러 민족에게 전파되었다. 그런데 이 고대 동방의 문화를 그리스로 전달하는 교량 역할을 한 것은 에게 문명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독창성을 발휘하여 형성된 차원 높은 문명이었다. 지중해 동쪽의 크레타섬,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르고스에 있는 미케네와 티린스, 메세니아에 있는 피로스 및 소아시아 쪽의 트로이를 잇는 삼각형으로 형성된 해양문명권이 서양 문명의 근원지가 되었다. 에게 문명은 두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전기는 크레타 섬이 중심이 된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1400년까지의 크레타 문명과 미노스 문명의 시기다. 유럽 최후의 청동기 문명이었다. 후기는 기원전 1400년부터 기원전 1200년까지의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와 티린스, 소아시아 트로이 중심의 미케네 문명의 시기다.
미노스 문화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발전한 미노스 문화는 그리스의 전설적인 왕 미노에서 유래했다. 크레타 섬사람들은 상당한 생활수준을 유지했다. 해상 활동을 통해 이집트, 페니키아는 물론 아시아와 접촉했다. 기원전 2000년경 기술이 발당하고 부가 쌓여서 크레타 섬에는 많은 도시가 생겼다. 대표적인 도시로는 크노소스, 파이스토스, 말리아 등이 있다. 도시마다 권력에 센 왕들이 있었다. 권력을 과시하는 방법은 역시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레타 세력은 이런 과시에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인다. 기원전 1700년부터 기원전 1450년 사이의 약 250년간 미노스 문화는 절정에 달했다. 이 기간에 크노소스 시는 다른 도시보다 강성했다. 섬 전체의 문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더욱이 이 모든 것이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합의에 의한 주도권이었다. 도시들이 서로 벽을 쌓고 구획을 나누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도시 사이에는 무력 충돌이 그렇게 잦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크노소스 시의 영향력은 크레타 섬을 넘어 지중해와 에게해에 광범위하게 미쳤다. 기원전 1450년경 크레타 해 북쪽 화산 테라의 폭발로 여러 도시들이 피해를 당했다. 그리스 본토로부터 미케네 인이 침입했다. 기원전 1400년경에 크노소스 시를 장악하고 중심지로 삼았다. 이를 계기로 크레타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 완전히 몰락했다.
크레타
크레타 사회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크레타 사회에는 징병제가 없었다. 침략이나 전쟁을 목적으로 결정된 직업 군인이 없었다. 그저 스스로를 지키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육군이나 해군이 소수 있었을 뿐이다. 거의 모든 사회 계층이 비교적 평등한 관계로 생활했다. 고도로 발전한 행정조직이 있었는데 부유한 귀족 계층은 왕권 유지를 위한 근간이 되었다. 상공업도 발달했다. 여러 가지 물품을 생산하며 지중해와 에게 해 일대의 다른 지방과 통상했다. 상류층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부녀자들은 궁이나 저택에서 사교활동을 했다.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있었지만 노예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크레타인은 스포츠 경기를 좋아했다. 무용이나 권투를 관람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다고 한다.
크레타인은 철기를 사용하진 않았다. 하지만 청동기와 석기제작에는 좋은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은 독특한 음절문자인 선문자를 창안했다. 이 문자는 그들의 상업 거래에 사용했다. 현대학자들이 선문자라고 부르는 크레타 문자는 미케네 문명이 번성한 기원전 1450년경 B형 선문자로 대치되었는데 이는 후에 그리스 문자의 바탕이 되었다. A형 선문자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하지만 B형 선문자는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해독되기 시작했다. 크레타 문자 해독의 제1단계는 1950년 히타이트 문자를 해독한 체코의 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크레타인은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신들, 소, 사슴 등 동물을 숭배했다. 다산의 여신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믿었다. 왕이 하는 일 중 도시 전체에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종교예식이 있었다. 이 예식은 주요한 왕의 역할이었다. 신정일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종교의식은 궁중에서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남녀 사제들이 신들을 모시기 위해 상주했다. 그 밖에 종교의식에 제물 바치기와 춤, 황소 뛰어넘기 같은 의식이 포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크레타의 종교예식이 거창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큰 신전을 만들지 않았다. 그저 가택, 언덕, 숲, 동굴 같은 장소에 소박한 사당을 마련하는 정도의 예식을 치렀다.
크레타인의 천재성은 조형미술에서 십분 발휘되었다. 그들은 고도의 건축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기술을 가지고 궁전이나 개인 주택을 만들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규모가 방대한 다층건물이고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 옥내 화장실 등을 두루 갖춘 고도의 건축 기술이었다. 앞서 그들이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건 일부 종교 예식과 관련된 건축과 한정되는 듯하다. 크레타인은 토목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위생시설이나 넓은 도로를 만들었다. 미술의 주제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건축은 기능과 미를 동시에 고려했다. 조각기법은 다양하게 채색된 토기와 장식적인 식각등에서 표현되었다.
영국의 학자인 애반스는 1900년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유적 발굴에 착수했다. 그는 5년 동안 길이 12.5km의 크노소스 시의 중심부에서 궁전을 발굴했다. 인구 8-10만으로 추정되는 이 도시 중심에는 왕족과 귀족이 거주하고 시의 외곽에는 하층민이 살았다는 것을 파악했다. 크노소스를 지배한 미노스 왕 궁전의 수많은 방들, 바다와 육지의 많은 동물을 그린 벽화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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