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 사후, 1715년부터 빈 회의가 개최될 때까지 한 세기 동안의 18세기를 우리는 혁명의 시대라고 부른다.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 산업혁명은 비단 두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적인 영향을 끼친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했다. 유럽 각국과 세계의 여러 나라까지 전파되었다. 산업혁명은 현대 인류의 경제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법도 있는 법이다. 빈부 격차와 노동문제,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롯한 환경오염 문제와 환경 파괴 문제가 대두되었다. 17-18세기는 지적 혁명이 일어났다. 자연과학과 철학, 정치, 사상과 같은 학문 영역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합리적이면서 항구불변인 자연법이 18세기의 거의 모든 사상가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 원리가 사회와 정치에 관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자연법에 대한 강조는 봉건사회의 잔재적 폐단을 비판하는 소리로 바뀌었다. 중산층과 농민 노동자들은 특권계급을 비판하고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였다. 18세기말에는 오랜 봉건 생활양식의 전환을 야기하는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18세기 혁명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르주아 계급의 승리였다. 더 많은 수의 부르주아들이 권력을 잡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는 과잉 성장했는데, 그 한계가 드러났다. 소득 분배를 둘러싼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역사적 쟁점으로 제기되었다. 18세기는 인류의 끝없는 진보를 지지하는 낙관주의로 점철될 수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대두한 새로운 문화와 사조는 어떠한 역사시대보다 더 혁명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지적혁명은 전례 없이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탐구심을 자극한 운동이었다. 그 결과 과학, 종교, 예술에 대한 지식인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지적 혁명의 기본 명제는 자연적인 것과 자연의 법에 대한 강조였다. 사상가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비되는 자연적인 것을 더 높이 평가했다.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사물에 인간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세 학문의 최고위였던 신학이 쇠퇴한 것이다.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했다. 새로운 형이상학은 물질과 정신이 다 같이 자연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는 큰 오만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형이상학과 신학, 철학은 자연법에 종속시키는 순간부터 인간 세계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모든 현상을 인간이 인지하고 조정할 수 있는 오만이 투영된 오판이었다. 이로 인해 인류의 정신세계의 큰 오류가 발생하는 비극에 빠지게 된다. 117-18세기의 지적 혁명을 지배한 정신은 합리주의다. 합리주의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이성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모든 현상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합리주의에 따르면 우주는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당시 사상가들은 각 개인은 합리적 사고에 따라 자연의 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법과 일치하여 자신의 생활을 합리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난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인간이 이성을 따라 산다면 인간의 은 행복을 누리며 끝없는 무한한 진보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는 침체나 퇴보가 없는 직선적인 발전이므로 궁극적으로 인간은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인도주의는 지적 혁명 시대의 보편적 흐름이 되었다. 자연법, 합리주의, 낙관적 진보관, 인도주의 등은 단순히 추상적 관념에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기본 명제에 따라 당시의 사상가들은 정치, 사회, 사상 분야의 실제 문제들을 지판 성토하였다. 이들이 바로 계몽사상가들이었다. 그들은 철학적인 논리를 분석하는 작업보다도 인간 생활에 직결되는 문제를 생각하여 실제적인 해답을 구하려고 했다. 지적 혁명은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 18세기 아메리카 혁명과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입각한 많은 운동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근대 유럽의 지적 혁명은 사실상 17세기 과학혁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과학혁명 덕분에 이론의 정확성이 중시되었다. 자연현상을 법칙에 따라 설명하려는 노력이 기본화되었다. 17세기 후반 과학은 학회를 설립하고 수학이 발달하는 등 큰 발전을 보였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시작으로 뉴턴의 중력법칙으로 절정에 달한 과학혁명은 근대 자연과학의 기반이 되었다. 이는 유럽 문명이 과학적 성격을 띠게 된 배경이 되었다. 수학은 과학 분야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다. 수학 발달은 과학혁명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다. 수학은 16세기 초에 아라비아 숫자와 단순화된 수학적 기호를 채택함으로써 커다란 진보를 보였다. 과학자들은 사물의 상호관계를 수학적 질서를 이용해 파악했다. 16세기 고전 기하학 발견이 수학 발달의 계기가 되었다. 수학이 지닌 정확성이 모든 체계적 탐구를 지배하는 경향은 매우 뚜렷했다. 이른바 기하학적 정신이 17세기 지적 풍토를 형성한 것이다. 갈릴레오는 수학이야말로 자연의 언어라고 강조할 정도였다. 데카르트 자신은 우주의 수학적 질서가 곧 신이라고 단언하면서 우주란 수학자가 창조한 거대한 기계라고 보았다. 17세기 수학의 혁신은 분수, 해석기하 등의 발명으로 가능했으나 특히 새로운 계산법인 미분법은 수학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분법은 영국 물리학자 뉴턴과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에 의해 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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