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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아메리카 혁명 - 7년 전쟁과 보스턴 차 사건

by 길반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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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권을 행사하려는 영국과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려 한 식민지인들

 랑케는 북아메리카 혁명을 세계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으로 꼽았다. 아메리카 혁명은 영국 헌법 내의 두 경향, 군주제와 민권사상 간의 충돌이었다. 유럽 대륙의 진보적 정치사상은 보수적인 영국보다 자유로운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에서 더 편했다. 자연권과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영향을 받았다. 18세기 중기까지 북아메리카카 혁명의 중심이 될 거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영국 식민지 거주민은 스스로 영국법을 준수하는 영국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어를 사용했고 영국에 있는 친지를 방문하기 위해 영국을 오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두 진영은 문제가 없었다. 1760년대까지 13주의 식민지는 자체 의회를 갖고 있었다. 비록 영국 왕이 임명한 지사가 거부권을 갖고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들 스스로 자주적 운영을 했기에 그들의 주체적으로 집행권을 행사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전통적인 귀족계급이 없었다. 봉건적 제약에 얽매인 농민도 없었다. 아직 개발해야 하는 미개척지만 무수히 많았다. 이런 배경이다 보니 새로운 정치 이념이 이식되기 쉬운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그런 그들이 1763년 7년 전쟁을 겪으면서 절대군주제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재정적으로 곤란해진 영국이 자국의 재정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에 중상주의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결국 독립을 선언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영국 본토의 정치,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당시 가장 앞선 정치이론의 기반으로 민주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례가 드문 체제 수립에 유럽 각국은 술렁였다. 특히 프랑스가 큰 영향을 받았다. 그 자극은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독립 전쟁을 아메리카 혁명이라고 칭한다. 

 1763년 7년 전쟁 후 영국은 캐나다 및 북아메리카 산맥 서쪽 지방을 얻게 되었다. 영국으로서는 이득을 얻었지만 이 지역을 지켜야 하는 방위의 부담까지 지게 되었다. 이 지역은 계속해서 인디언들의 반란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에 맞게 군을 파병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는 재정의 소진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1763년 10월 앨러게니 산맥 서쪽 지방에 식민지인들이 정착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이 조치는 서쪽과의 통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과가 발생하기 때문에 식민지인들은 불만이 컸다.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반발에 영국은 강경한 경제 정책을 펼쳤다.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경제정책은 주로 중상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1650년 이후 영국은 이 정책을 강화했다. 크롬웰 시대의 항해법에 따라 식민지에서 나는 물품은 영국 선반만이 영국 항구에 운송할 수 있었다. 꼭 영국의 손길을 거쳐야만 수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영국 내의 생산자들과 경쟁하는 것을 금지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양질의 물품을 싼 가격에 제조할 수 있었지만 영국 내의 시장이 죽을 수 있다는 명분으로 생산을 금지했다. 물론 규제에는 상호적인 측면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 본토에서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접사업인 담배 재배를 금하기도 했다. 식민지의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의 상인은 영국만을 상도로 한 통상을 반길리 없었다. 막으면 어둠의 경로가 생기는 법이다. 결국 밀수가 암암리에 성행하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에서도 이런 밀수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았다. 묵인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런 영국의 묵인과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요소로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7년 전쟁 후 영국 정부는 식민지 경영에 좀 더 강경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1763년 내각수상 그렌빌은 식민지인의 통상활동을 통제하려고 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방위부담을 식민지인에게 부분적으로 요구했다. 그동안 묵인해 오던 밀수도 단속했다. 관세수익을 노린 것이다. 그로 1년 후 설탕세법은 그렌빌 내각이 증세를 위해 노골적으로 실시한 정책이었다. 설탕세법은 외국산 설탕 수입에 대해 항해법을 적용했다. 이러한 정책 전환은 동부 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날이 갈수록 영국의 통제가 심해지자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영국 정부와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들은 대의 없는 과세는 압제라며 대의권을 요구했다. 대의 없는 과세를 맹렬히 반대하는 식민지인의 항의에 직면하여 영국은 1766년 인지세법을 폐지했다. 그러나 영국 의회는 1766년 선언법을 통과시켜 식민지의 지위를 규정하였다. 식민지인은 영국 왕과 의회에 예속하고 의존하는 백성이기 때문에 영국에서 제정된 법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연달아 부과된 세금으로 양쪽의 날은 서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식민지인들에 대한 규정을 하는 법을 통과시킨 것은 식민지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휘그당의 로킹업 내각 재무장관 타운젠드는 1767년 다른 각료의 승인도 없이 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법은 타운젠드 법이라고 한다. 내용은 매사추세츠 주 의회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식민지의 방위를 위해 주둔하는 영국군의 경비를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차, 종이, 페인트, 납 등의 수입에 관세를 부과하는 법이었다.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 등의 식민지인들은 조직적으로 이 세법을 거부했다. 특히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아메리카 상인들이 즉각 반발했다. 1770년 영국은 관헌을 파견하여 소동을 일으킨 보스턴 시민들을 진압했다. 이것이 보스턴 학살 사건이다. 1770년 노스는 타운젠드법을 철폐하고 파운드 당 3 페니를 부가하는 차세에 관한 법을 만들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거의 파산할 지경에 이르자 노스는 회사의 재고 차를 식민지인에게 매각하는 것을 허가했다. 식민지인이 밀수하는 네덜란드 산 차보다 훨씬 싸게 인도 산 차를 판매하려고 했다. 그 결과 차세와 수입제약을 반대하는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졌다. 1773년 12월 중순 아메리카 인디언으로 가장한 시민들이 동인도 선박 3척에 침입했다. 그들은 보스턴 부둣가의 많은 시민이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배에 실렸던 수백 상자의 차를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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