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사

페르시아와 조로아스터교

by 길반 2023. 6. 26.
반응형

최종적으로 고대 동방을 통일한 세력은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인은 본래 인도-유럽 어족에 속한 민족으로 기원전 2000년경 이란 남쪽, 페르시아 만 동쪽에 정착하였다. 페르시아란 명칭은 그리스인이 이란 서부를 "페르시스"라고 칭한 데서 유래하였다. 페르시아는 비록 정치적으로 독립을 유지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아시리아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499년 지중해 연안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페르시아는 이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 일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이 발생했다. 다리우스 대왕은 그리스 본토에 대한 대규모 원정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끈질긴 저항으로 실패했다. 고대 동방의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한 통일세력이었던 페르시아는 패전의 후유증으로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다리우스 3세 시기에 내란을 겪은 페르시아는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 출신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했다. 이로써 유럽 역사의 중심이 고대 동방에서 서쪽의 그리스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출현은 세계사적 의미가 크다. 고대 동방 중심의 문명 세계가 이젠 서방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의 정복과 활동권의 확장은 문물과 문화의 이동 현상을 낳았다. 

 페르시아는 각 정복지의 관습과 문화를 존중하고 자치를 인정하는 유화정책을 실시하였다. 메디아 귀족들을 행정에 참여시키거나 유대인을 포로에서 풀어주는 방식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 결과  페르시아 문화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및 그 밖의 지역의 문화를 흡수하고 종합하는 유화적인 성격을 띠었다. 고대 동방의 넓은 지역과 역사적 전통을 통합한 것이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는 도로, 항만, 선박, 우편제도 등을 정비했다. 더불어 해상통로를 발달시켰다. 수사와 페르세폴리스 같은 수도에 거대한 왕궁을 건축했다. 페르시아어와 바빌로니아어, 아람어 등 공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 밖의 다른 언어들도 통용하였다.  페르시아는 도량형을 표준화하고 화폐를 유통시켜 세제를 정비했다. 농산물로는 보리, 밀, 포도, 올리브 등을 재배했고 소나 양을 목축하였다. 목재와 석재가 생산되고 광업 및 수공업도 발달했다. 페르시아인의 통상범위는 페니키아, 아라비아, 그리스, 인도 및 라인강이나 다뉴브강 유역에까지 폭넓게 확대되었다. 페르시아의 문화는 새로운 종교를 통해 역사적으로 기여했다. 페르시아 종교는 기원전 15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 종교는 이원론에 바탕을 둔 믿음이었다. 페르시아 인들은 자연의 힘을 믿었다. 하늘의 신과 불의 신을 숭배했다 제물, 주술, 기도 등 복잡한 의식을 통해 신의 은총을 입으려고 했다. 페르시아인의 초기 종교에서는 마기라 불리는 사제들이 주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조로아스터교

 기원전 7세기에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종교다. 조로아스터는 페르시아 이름 자라투스트라를 그리스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니체의 책을 통해 그의 페르시아 이름이 우리에게 더 익숙할 것이다. 니체가 언급한 그의 이름은 우리가 다른 쪽으로 익숙한 조로아스터의 페르시아식 표기인 것으로 기억하면 되겠다. 조로아스터교의 핵심은 선신과 악신의 대립을 통한 이원론으로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의 특징은 종말론, 윤리성, 계시성 등에 있다. 이 종교의 경전은 젠드-아베스타라고 한다. 조로아스터교에 따르면 지혜, 빛, 진리, 창조, 전지전능의 선신 아후라마즈다는 정의, 진실, 미덕을 관장하는 최고신이다. 이에 반하는 어둠의 악신 아리만이 있다. 아후라마즈다는 이 아리만에 대항하여 싸운다. 선악을 대표하는 두 신이 우주 창조 이래로 영원한 싸움을 벌이면서 우주에 역동적인 힘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후라마즈다는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 애씀이 세계를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 조로아스터교의 본질이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배화교, 또는 "요교"라고 불렸던 것이다. 인도에서는 파르시 교로 되었다. 파르시 교는 이교도와 혼인을 하지 않은 배타성이 강했다. 흙, 물, 불 등을 신성시하여 매장 대신 풍장, 조장의 관습을 갖고 있다. 파르시족은 인도의 경제력을 좌우하는 부호 또는 세계적인 지휘자 주비 메타 등 우수한 인재를 배출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기존 문명의 요소들을 받아들여 적절히 보존 발달시켜서 지역문화와 공통문화를 혼합한 세계화의 풍토를 마련했다. 설형문자를 수용했고 인도-유럽어를 적을 수 있게 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천문학과 수학과 관련된 문화를 받아들였다. 페르시아인은 외래 종교에 대해 매우 관용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타 이방 신을 위한 신전을 짓는 것도 허용했다. 이와 같은 문화 혼융을 통해 페르시아는 모든 고대 동방의 전통적 문화를 종합했다. 

 페르시아가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전에는 많은 군소 국가들, 특히 리디아, 메디아, 신바벨로니아 등이 서로 경합했다. 리디아와 메디아는 히타이트가 몰락한 후에 처음 대두한 작은 왕국이었는데 아시리아가 멸망한 후에 크게 부상했다. 리디아 민족은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 중기까지 국가를 유지했으며 리디아의 가장 유명한 왕은 크리오소스이다. 그는 에게해 연안 일대의 그리스 식민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소아시아를 지배했다. 그러나 리디아는 결국 페르시아의 강력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기원전 547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메디아 역시 아시리아 멸망 이후 부상한 세력이었다. 본래 북이란에 그거를 둔 메디아인은 아시리아에 예속되고 있는 동안 아시리아 문화를 도입하면서도 아시리아를 공격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아시리아 몰락 후에는 이란에서 소아시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메디아의 정치체제에는 약점이 많았고 지방의 유력한 제후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제후 중 하나인 키로스 2세가 기원전 559년 메디아 왕을 폐위하고 왕국을 차지하였다. 이것이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작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