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00년경 소아시아에서 가장 두드러진 세력은 히타이트 민족이었다. 오랫동안 히타이트 민족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었다. 1907년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샤시' 유적지에서 금석문이 발견되었다. 이 발견으로 비로소 히타이트의 역사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히타이트인은 본래 목축을 주로 하는 기마민족이다. 철제도구를 사용하고 철제 무기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들로 추측한다. 당시 청동과 돌이 도구로 쓰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기술적인 우월성을 지니고 있는 뛰어난 집단이었다. 그들은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를 계승하였고 더 높은 수준으로 문화를 발전시켰다. 히타이트 민족은 소아시아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아나톨리아의 하티 문화를 받아들였고 아시리아 상인과 통상하면서 설형문자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히타이트 민족은 하티와 아시리아 두 문화를 혼합하면서도 정치제도, 법, 종교, 문학, 미술, 기술에서 새로운 독창성을 발휘했다. 히타이트 민족이 소아시아를 지배한 것은 이 지역의 문명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철 제련 기술을 개발하여 철제 무기와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하게 되면서 차원 높은 문화를 이룩하고 고대 동방 전체에 걸쳐 우세를 확립하였다. 히타이트 왕국은 매우 진취적인 활동을 벌여 무역범위도 넓혔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를 실시하고 토지사용, 물가를 통제하였다. 바벨론의 영향을 받은 히타이트 법은 한층 더 발전한 양식이었다. 주로 무역활동에 관한 규정이었다. 히타이트의 건축이나 조각은 단순한 양식이었다. 주제는 전쟁이나 신화에 관한 것이었다. 종교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그들의 전설이나 종교적 설화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문화는 계속해서 수용의 절차를 걸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것들을 융화하여 혼합하는 과정을 거치느냐 거치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 깊이와 시간이 더해지면 자신들만의 문화가 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이어가는 인류에 대한 자산으로 바통이 넘어간다.
히타이트의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보다 격상되었다. 히타이트 문명은 지리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소아시아의 트로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 있다.
히타이트 제국의 성쇠
히타이트 민족은 기원선 1600년경 하투샤쉬를 수도로 한 단일 왕국을 수립했다. 그들은 기원전 13세기말까지 소아시아의 대부분, 북메소포타미아, 북 시리아를 공략하고 카시트 민족과 연합하여 바벨론 시를 약탈했다. 남쪽으로 이집트와 접경하는 최대의 영토를 차지했다. 히타이트 왕국은 이집트의 동맹국인 미탄니 왕국에 압력을 가해 굴복시키고 끝내는 미탄니를 멸망시켰다. 또 기원전 1400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있는 이집트의 제후국이 일으킨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전성기인 스필룰리우마 왕에 이르러 이집트 세력을 몰아냈다. 당시 이집트는 아케나텐의 종교개혁 여파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앞에서 본 것처럼 아케나텐의 종교개혁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기존에 이어져오던 것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한 결정은 대중들의 거부감을 샀다. 하지만 이건 지나치게 일차원적인 접근이다. 만일 지배층들이 이런 아케나텐의 개혁을 지지했다면 과연 실패했을까? 아마 기존에 숭배하던 신들은 기득권의 이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세워놓은 힘의 바탕을 건드린 것이 아테나텐의 종교개혁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기득권의 이윤이 연관되어 있는 정책들을 쉽게 폐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집트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회복하려고 했다. 이에 대항하여 히타이트 왕은 시리아에 대한 패권을 둘러싸고 이집트와 최대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매우 격렬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승리라고 단정 짓기에는 양쪽의 피해가 극심했다. 기원전 1279년 카데쉬 휴전조약으로 이집트와의 전쟁은 일단 중지되었다. 카데쉬 조약의 원문은 앙카라의 아나톨리아문명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조약은 양국 간의 방위 및 상호 원조조약으로 현존하는 것 중 세계 최고 오랜 된 것이다. 최초의 국제적 평화조약이란 점에서 이 조약문은 뉴욕시의 유엔 본부 건물에 조각되어 있다.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12세기로 넘어가는 기간에 히타이트 왕국은 서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약화 조짐을 나타냈다. 그리고 기원전 1190년경 히타이트는 에게 해 쪽에서 쳐들어오는 해상민족의 파상 공격으로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방대한 고대 동방은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아시리아 민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히타이트 왕국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약 500년간 계속되었다.
인도-유럽 어족
사용 언어의 공통성으로 분류되고 있는 인도-유럽 어족은 현재 북유럽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사용되고 있는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을 가리킨다. 가끔 아리아 민족이라 불리기도 한다. 인도-유럽 민족의 종족적 구성은 다양하며 수천 년을 거치면서 여러 갈래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분파되었다. 켈트어, 게르만어, 로망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그리스어, 슬라브어, 인도-이란어 등이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인도-유럽 민족은 기원전 1700-1400년경까지 계속된 1차 이동에서 북인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및 그리스 지방으로 퍼졌다. 그리고 2차 이동은 기원전 1200-900년에 행해졌는데 이때 그들은 서유럽에까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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