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종교개혁이라는 말이 생소할 것이다. 다신교 혹은 범신교를 믿는 이집트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기원전 14세기 중밥 대내적 위기와 외부세력의 위협, 특히 히타이트의 위협이 고조된 시기였다. 아멘호텝 4세는 왕비 네페르티티의 조언을 받아 종교제도를 바꾸려고 했다. 그는 태양신 아텐 숭배에 기반을 둔 새 종교를 선포하였다. 아텐 신은 삶의 근원이며 모든 존재물에게 태양의 빛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신이라는 것이었다. 과거 신앙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멘호텝 4세는 자신의 이름을 아케나텐으로 고쳤다. 아케나텐의 뜻은 아텐 신을 기쁘게 한다라는 뜻이었다.
아케나텐은 숭배해 온 신들을 가짜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대한 숭배를 금지하였다. 신전은 파괴되었고 관련된 사제들은 쫓겨났다.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미술양식이 아텐 신을 숭배하기 위해 창출되었다. 이러한 종교적 변혁이 이른바 아마르나 혁명이었다. 이때의 종교개혁 시도를 두고 현대 학자들은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아케나텐 개인의 위대석을 부각하려 했다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문화 형성 과정의 산물로 보는 것이다.
아케나텐은 종교개혁을 상징하는 뜻에서 새 수도를 건설했다. 수도를 테배에서 새로운 도시 아케타텐으로 옮겼다. 거대한 신전을 세우고 아텐을 숭배했다. 종교를 반영한 이 시기의 미술은 사실과 추상을 조합한 고왕국 시대와 달리 철저한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조각가들은 아케나텐의 모습 그 자체를 묘사하고 친근감 있는 그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러나 아케나텐의 일신교 종교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주요 원인은 일신교적 종교가 이집트인의 과거와 전혀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일신교에 대한 광신은 전통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뿌리 깊게 다신교가 내려있는 사회를 한순간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어떤 고통에 쳐해있지 않았다. 그들의 다신교를 위협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에게 지배당했던 히브리인들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히브리인들은 억압에 빠져있었고 그들을 구원해 줄 다 하나의 절대적인 존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야웨라는 신을 믿었다. 그들의 소망과 절박한 심경이 투영된 존재였다. 그 절대자는 유일해야 했다. 절대적인 힘이 그들을 구원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집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적인 힘이 강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후를 걱정할 정도로 현생이 안정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복지와도 같은 개념이었다. 그들이 풍요로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존재들이 있으면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 존재는 그들에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많이 신이 필요했다. 아케나텐이 죽으면서 그가 추구했던 일신적 흐름은 사라졌다. 그가 죽은 후 후계자인 투탕카멘은 신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을 회복시켰다. 투탕카멘은 아텐 신 숭배에 관한 모든 자취를 철저히 지워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다.
이집트인은 실용과학 측면의 선구자였다. 농사에서 나일강 범람 후 일정 기간의 건조기를 거쳐 파종을 했다. 범람 시기 및 계절의 순환을 알기 위한 천문학과 역법이 발달했다. 이집트의 태양력에서 1년은 30일을 한 달로 하는 12개월이며 1년 끝에 5일을 추가한 것으로 아주 정밀한 달력이 아니었다. 나일강 범람 후 농토를 다시 재정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삼각측량과 기하학이 발달했다. 이집트인들은 숫자로 수량 계산을 했다. 금속의 성질이나 식물과 동물의 생활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의술은 주로 마귀를 육체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신체 각 부위마다 신이 있어서 노래로 이 신을 부르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당시 의사들은 치과, 외과 또는 위 전문가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들은 심장이나 맥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고 간단한 수술을 하기도 했다. 각종 약초의 효능을 연구하고 약품 목록을 만들기도 했다. 이집트인은 토목, 금속, 의학 등 실용적 문제 해결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이집트 문자와 파피루스
고대 이집트 문자는 세 가지 형태로 발달했다. 기원전 3200년경에 나온 신성문자는 설형문자와 같이 그림문자였다. 주로 종교행사를 기록하는 데 사용했다. 초서체인 공용문자는 상업 통신용이었다. 일반 사람들이 쓰는 민간 상용문자도 따로 있었다. 이집트의 초기 기록은 피라미드 벽 위에 새겨진 송가, 기도, 주문, 신화 등으로 남아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점토판을 사용한 것처럼 이집트인은 파피루스에 기록했다. 이것을 파피루스 문서라고 한다. 이 문서는 고대 이집트의 궁중 생활, 습관, 역사, 내세관을 파악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다.
고대 이집트의 미술분야에서도 자연숭배와 내세관이 반영되어 있다. 이집트 건축의 역사는 분묘의 역사라 할 정도로 사후세계와 관련이 있다. 피라미드는 삼각형의 각추 모양으로 돌을 쌓아 올려 만든 거대한 분묘다. 고왕국 4 왕조 때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 건조된 크고 작은 70여 개의 피라미드가 현재 남아 있다. 분묘, 특히 피라미드는 많은 유물, 파피루스 문서, 회화 등 좋은 역사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집트 고대 생활의 박물관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회화는 사실적 경향과 단순화 경향의 양면성을 띠고 있다. 이집트 회화에서 근대적 원근법은 무시되고 사람들의 얼굴을 옆으로만 그린 것이 특이하다. 색채의 배합은 단순하며 빨강, 노랑, 녹색 등 원색이 자주 사용되었다.
이집트 문명의 역사적 의의
이집트 문명의 놀라운 성과는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태양력과 삼각 측량과 같은 몇 가지 각별한 업적은 모두 이와 관계가 있었다. 이밖에 생활양식, 사상, 조각, 회화, 건축 등은 독자적인 특징이 있었다. 이집트 문명을 이후 서방 세계의 역사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세계에도 유산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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