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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아시리아 문화의 특성

by 길반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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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서 살펴보길 인류문명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지형적으로 개방된 지형이었기에 많은 많은 민족의 유입이 쉬웠다. 결국 잦은 정복전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에서는 많은 민족과 국가가 등장하고 멸망했다. 그러다 기원전 9세기에 미로소 단일한 정치체제로 통일되었다. 이 통일을 이뤄낸 세력이 바로 아시리아와 페르시아였다. 고대 동방을 앞서 통일한 민족은 셈어족에 속한 아시리아였다. 아시리아는 남쪽 바빌론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시리아 역사는 19세기 중반의 고고학적 발굴로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약 2만 장의 설형문자 점토판 도서와 아시리아 도시들의 유적에서 나온 금석문들이 아시리아에 대한 귀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아시리아인은 기원전 3000년경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티그리스강 상류로 이동했다. 그곳에 정착한 그들은 이래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다. 기원전 2000년대를 전후로 수세기 동안 아시리아는 사르곤 1세에서 함무라비 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아나톨리아 지역은 청동기 시대가 한창이었는데, 아시리아인은 끊임없이 타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유목민족과 카시트 민족이나 히타이트 민족의 공격을 받았다. 이처럼 아시리아인은 주변민족으로부터 계속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단결하는 흐름을 형성했다. 외부의 적이 자연스럽게 내부적 결속을 일궈낸 것이다. 많은 침략은 그들로 하여금 내실을 다지게 만들었다. 군사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호전적인 민족성을 갖게 되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000년경 새로운 철기문화를 도입했다. 더불어 전차까지 도입한 후 고대 동방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역시나 철기다. 철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주변과 비교하여 선진 문물, 선진 기술을 갖추는 것은 항상 국가의 흥망성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어떤 것이 선진 기술이고 미래를 담보하는 가치인지 파악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아시리아의 성장은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후 7세기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아시리아는 더 이상 자국을 방어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젠 그들이 공격하는 침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장시켜 나갔다. 

 아시리아 제국의 시조는 티그라트-필레세르 3세였다.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에 이르러 많은 정복활동에 성공했다. 북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및 소아시아, 동쪽으로는 이란, 남쪽으로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및 아라비아 사막과 이집트에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들이 애초에 호전적인 성향은 아니었다고 얘기했지만 결국 그들의 대제국 건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철저한 호전성과 군국주의였다. 대외적으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내부적으로 강력한 공포정치가 필요하다. 전쟁에 대한 단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내적으로 강력한 군대를 배경으로 공포정치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정복민족으로부터 공납을 받았다. 대량학살, 고문, 시체 전시 등은 다반사였다. 아시리아의 수도는 니네베였다. 아시리아는 니네베를 중심으로 철저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했다. 교역과 상업이 발전했다. 기원후 650년경 고대 동방의 거의 대부분 지역은 아시리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아시리아 왕은 그야말로 세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지금의 국제사회의 정세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모든 나라가 주권을 갖고 있지만 국력의 차이는 존재한다. 국력의 차이에서 오는 국가의 위상도 차이가 있다. 최상위에 있는 국가의 지도자는 리더 사이에도 큰 힘의 차이가 발생한다. 실상 이들 중의 최상위 권력자가 세계의 대통령 격의 권위를 갖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과거의 위세가 더욱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었을 것은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아시리아의 통일한 정치세력이 약 3세기간 계속되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안정기가 유지되었다. 그들이 수립한 중앙집권적 군주제는 이후 여러 나라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무역 통상을 장려했다. 각 지역의 물품이 활발히 거래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걸쳐 공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문물과 사상의 교류를 촉진했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 했듯 아시리아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공포정치는 자발적인 순종을 끌어내지 못한다. 대내적으로 국민의 불만과 응어리는 커지기 마련이었다. 대외적인 중세 정책도 이민족의 반발을 샀다. 세금은 국민도 불편한 것인데 타국에 대한 세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중복되는 문제로 아시리아의 국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기원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인, 갈대아인, 스키티아인 들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결국 멸망했다. 그 후 고대 동방에서는 갈대아, 메디아, 이집트, 리디아 등 네 나라가 서로 대립하였지만 갈대아인이 세운 신바빌로니아가 수도 바빌론을 중심으로 제일 강한 나라가 되었다. 

 

 문화적으로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계승했지만 그들만의 독창성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건축은 수메르의 것을 모방했고, 조각은 군사문화를 많이 반영했다. 아시리아의 왕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도시들을 대대적으로 건축했다. 신전과 궁전은 거대한 조각이나 부조로 장식했다. 아시리아의 종교는 메소포타미아, 특히 바벨론을 통해 받아들인 수메르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국가신인 아수르는 바벨론시의 마르둑 신과 비슷하고 종교의식에서도 초기의 메소포타미아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야말로 베끼는 수준이었다. 이처럼 한 문화를 독자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베끼고 따라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다수다. 한 문명을 세우고 문화를 형성한다는 것은 무척 큰 업적이다. 아시리아 문명은 고대 동방의 문화전통을 충실히 계승하여 바빌론과 수메르 문명을 널리 정복 지역으로 전파했다는 점에서 그 문화사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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