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아 발달되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나름의 독창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이집트는 상이집트와 하 이집트로 나뉘어 있었다. 기후는 각각 열대와 아열대에 속해 있었다. 고온 건조한 기후는 일생생활이나 기록보존에 매우 적합했다. 나일강변으로 형성된 비옥한 지대를 제외하고는 황량한 사막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앞서 본 메소포타미아와는 확연하게 대비되는 점이다. 이런 자연환경이 주변을 두르고 있다면 당연히 이민족의 침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럼 비교적 자신들 내부 사정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집트는 외부세력의 침입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집트 문화는 나일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나일강은 아프리카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세계 최장의 강이다. 폭포가 없이 흐른다. 거센 물결이 없다는 얘기로 이 또한 큰 이점이었다. 안전하게 통상과 교통의 수단으로 강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일강은 해마다 거의 정기적으로 물이 불어나고 줄기 때문에 비옥한 검은 땅을 형성했다. 이곳은 풍요로운 농업생산이 가능한 터전이 되었다. 나일강 양쪽 깊은 계곡과 주위를 둘러싼 사막이 방패막 역할을 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이집트는 외부 민족의 침입을 받지 않도록 오랫동안 통일된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다. 나일강의 정기적 범람은 이집트인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학문,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5000-4500년경 나일강 계곡에서 농사가 시작되었다. 그 후 수천 년에 걸쳐 이 지역에서는 관개 농업으로 홍수를 통제하고 나일강 계곡의 비옥한 땅을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했다. 기원전 3200년경 여러 공동체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집트는 비교적 오랫동안 정치적 안정과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집트가 완전히 폐쇄적인 것은 아니었다.
왕은 파라오라고 불렸다. 역대 파라오는 세습적인 절대 전제군주였다. 파라오는 종교적 최고 책임자인 동시에 정치적 수장이었다. 그는 신격화되고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믿었다. 이집트인들은 태양신 호루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파라오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가 거처하는 곳은 마땅히 화려하고 거대한 궁전여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의 무덤 역시 파라오의 권위를 반영하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피라미드의 거대함은 그런 태양신 파라오를 바라봤던 당시 사회의 관념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집트 사회와 경제
사회적으로는 모든 부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파라오가 정점에 있으며 소수의 귀족계급이 사회를 지배했다. 사제와 파라오의 관리들의 권력은 강력했다. 하층계급은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목숨은 관리들에게 달려있었다. 그야말로 노예의 삶이었다. 세금은 수확의 5분의 1에 달하는 양이었다. 이러한 착취의 내용은 대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파라오의 무덤에 남아 있는 잔존기록을 보면, 착취와 노동의 내용보다 농민, 직인들이 일하고 노는 데서 오는 만족감과 즐거움을 느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극히 편향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노예는 신왕국 이전까지 보편적인 제도가 아니었다. 고정된 계층이나 인종차별은 없었다. 고왕국과 중왕국 시대의 경제는 주로 잘 통제된 농업체제에 의해 유지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밀, 보리, 채소, 과일이었다. 농민은 농업에 종사했지만 파라오가 조직한 거대한 건설사업에 동원되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까운 조선으로 가보면 해당 내용이 더욱 면밀하게 이해될 것이다. 우리의 백성들도 농민들이었지만 나라사업이 있으면 역의 의무를 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그것조차도 소작으로 빼앗기도 없는 시간을 노역에 동원당했으니 가족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은 꿈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계층 논리는 참 비참하다. 모두가 파라오와 관료, 사제, 지방 호족을 위해 일을 하였다.
이집트의 문화
고대 이집트의 부는 창의적 활동을 뒷받침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형성했다. 종교는 사회의 모든 분야를 지배했다. 특히 문화의 주요 동인이 되었다. 이집트 문화는 종교의 강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결과다. 종교는 경제, 사회, 정치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집트인은 사후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존재가 있어서 사후 세계에서도 행복한 삶을 유지해 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영혼불명을 믿으며 육체가 부패하지 않으면 영생 불사한다는 내세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었다. 사후의 자신들의 형체인 카가 죽은 후 썩지 않은 육체를 가지고 영생한다는 생각이었다. 생전에 자신이 누리던 음식, 사치품, 반려자가 함께 묻혀야 사후에도 그것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 매장과 순장이라는 행위로 이어졌다.
이집트인은 수천의 신들이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연현상, 천체, 동식물, 새, 사람들 또는 추상적 존재물의 형태로 신들을 묘사했다. 신은 모든 곳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하늘과 땅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인간이 사는 곳에 어디서나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라 전체에서 숭배하는 신은 태양신이 라가 있었다. 사후 세계의 신 오시리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 아들 호루스가 있었다. 오시리스는 나일강과 관련된 삶의 원천이고, 다산의 신으로 추앙되었다. 오시리스는 해마다 죽는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시스 신이 다시 그의 생명을 회복시켜 준다고 믿었다 오시리스는 사자의 신으로 죽은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무게를 재서 올바르게 살았는지, 영생의 자격이 있는 지를 심판했다. 오시리스의 죽은 자 재판은 재칼의 머리를 한 아누비스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는 아누비스는 해마다 이시스가 오시리스를 부활시킬 때 도와준다고 믿었다. 매의 신 호루스는 이집트를 최초로 통일한 메네스가 숭배한 신이다. 고왕국의 주신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테배의 하위 신이었던 '아문'은 중왕국 시대에 이르러 파라오의 집권과 함께 중요한 신으로 승격되었다. 호루스와 '아문'은 가장 강력한 국가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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