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아버지가 집안의 대소사를 다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냐면 남자가 어떤 부채를 지게 되었다고 치자. 그럼 남자는 집안의 여자나 아이들을 노예로 팔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경제상황이 파탄에 이르게 되면 이성이 무너지고 만다. 이렇다 보니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함부로 반항할 수도 없었다. 물론 반항이 권리는 아니지만 자발적이냐 강제적이냐는 큰 차이를 갖는다. 만약 자식이 아버지를 때렸다면 그 자식의 팔을 잘랐다. 부녀자는 남자 재산의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 활동도 할 수 있었다. 귀족 집안의 부녀자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에 수혜를 누렸다. 사실 이건 특별한 것이 아니다. 현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현상들 아닌가?
메소포타미아의 법조직은 교역의 필요에 따라 일찍부터 발달했다. 서양세계에서 가장 먼저 성문법이 만들어진 곳이 바로 메소포타미아였다. 다른 지역에 법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소박했다. 아직 법제가 발달하지 못한 초기 단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메소포타미아 법제는 치밀하게 발달되었다. 형사문제나 민법과 상법과 같은 넓은 영역까지 규정하고 있었다. 굉장히 정밀하게 법제가 세워있었음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법제의 특징으로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복수법이다. 이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동태복수 원칙을 말한다. 둘째는 준사형원칙이다. 준사형원칙이 무엇인가? 이는 법정이 공공의 안녕을 위한 국가기관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한다. 법정은 주로 분쟁 중재 및 조정 역할을 주로 하였다. 법을 집행하기 위해 사건 관련자들을 직접 체포해 오거나 하지 않았다. 피해자 또는 그의 가족들이 가해자를 법정으로 직접 데리고 와야 했다. 셋째는 불평등 원칙이다. 귀족, 평민, 노예 계급 사이에 형벌의 차이가 있었다. 같은 범죄를 저질렀어도 평민의 경우는 귀족의 경우보다 형벌이 가혹했다. 노예는 말할 것도 없었다. 고의적 범죄나 우발적 사고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것도 특징이다. 절대 실수였어요, 몰랐어요 같은 말은 허용되지 않았다. 사고로 인한 살인도 우발적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살인은 살인이라는 태도가 기본 판단의 잣대였다.
함무라비 법전
기원전 18세기 전반 함무라비 왕이 즉위 38년에 법전을 반포했다. 법의 내용을 비석에 새겨 주요 도시의 신전 입구에 세워 일반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현대에 이 법전비를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높이 2.5m, 둘레 1.8m의 탑형 법전비에는 앞뒤로 44칸 3천 행의 282조의 법조문이 새겨져 있다. 법전비의 윗부분에는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에게 법전을 받는 광경이 그려있다. 바로 아래의 전문에서 그는 바벨론의 보호신 마르두크가 인민을 다스리고 나라에 도움을 주도록 당부했으므로 나는 이 땅의 언어로 법과 정의를 세우고 인민의 복지를 증진하였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악한 자를 없애고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지 않도록 신이 자신에게 법전을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을 받기 위한 자는 이 비 앞에 와서 읽고 따르라 이 비는 그대들에게 법을 명백히 가르치고 권리를 지켜줄 것이며 함무라비는 나라의 주인으로 국민의 아버지라는 말이 앞서 선포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다른 고대 법제에서도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원시적 율법의 자취도 농후했다. 혐의자가 물속에 던져져 물에 뜬다면 무죄라고 보는 허무한 내용들도 있다. 현대의 우리가 보기에는 허무맹랑한 기준들이다. 중형, 보복의 원칙은 형법과 민법, 그리고 상법에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부모를 때린 자식은 두 손을 자른다는 것, 불난 집에 든 도둑은 화형 시킨다는 것들과 같이 중형 원칙이 적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의의가 있다. 형법과 민법, 상법 관련의 여러 규정을 통해 당시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법이라는 것이 실생활에서 발생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문제기 때문이다. 법전의 내용을 통해 개인보다 국가권력이 우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적 토지 소유나 병역의 의무를 규정하고 관개에 대한 규칙을 정하고 있었다. 적정임금이나 공납에 관한 상거래 조항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상업중심의 상회였다는 것도 추측할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의 특징은 다른 고대 사회 법제가 단순했던 것과 다르게 매우 정밀했다는 점이다. 282조에 달하는 많은 법 조항은 당시 사회가 그만큼 복잡하게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서문명이 교차하는 지역이었기에 다양한 사람들이 왕래했고 그에 따른 통상활동이 활발했을 것이니 그만큼 사회 행위에 대한 규제의 다각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함부라비 법전은 정의개념을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수립했다. 모든 국민의 행위를 지배하는 규칙을 계몽 군주와 같은 입장에서 제정한 것이다. 왕은 백성들을 교화하는 계몽군주라고 여겼던 것이다. 법전의 내용이 처벌이 가혹했던 것은 꼭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정의를 세우려는 법전의 목적이 엿보인다. 법전을 통해 처벌이나 복수의 한계를 명백하게 규정했다. 되로 갚아준다는 식의 복수의 증폭이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을 조기에 방지한 것을 해석할 수 있다.
정부와 법은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해결하는 수단이었다. 통치자는 백성이나 신들에 대해 책임지며 지상생활의 안정을 보장한다는 것이 메소포타미아의 법 개념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민족국가들은 지리적 조건이나 정치조직에서 서로 달랐으나 법과 국가관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즉 설형문자와 법령집이 이 문명의 공통된 특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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