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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혁명파 사대부와 정도전

by 길반 2023.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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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을 개창하고 왕이 된 것은 이성계였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역성혁명을 주도한 것은 혁명파 사대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설계하고 그들이 집행한 것이었습니다. 곧 조선 건국의 주도자는 혁명파 사대부들이었고 그들의 지도자격인 정도전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재상 중심 정치를 지향했습니다. 재상 중심 정치는 왕을 중심이 아닌 유능한 신하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치를 말합니다. 한 명의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능한 신하들이 힘을 모아 올바른 정치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정도전이 이런 집행이 가능했던 것도 이성계가 이를 지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지를 바탕으로 정도전은 태조 시기 정치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봉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중앙 정부에 대한 독립성이 있었습니다. 독립성은 비판정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호장이라는 지위가 있었는데, 호장은 고려의 지방 호족들에게 부여한 지위였습니다. 이들이 고려 중기부터 과거를 거쳐 중앙 관료로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신진 사대부라는 새로운 비판 그룹을 형성했습니다. 신진 사대부들은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가담하면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이 세력에 정도전도 함께 있었습니다. 정도전은 신진 사대부 세력의 주류를 형성한 이색의 문하였습니다. 고려 말 대표적인 성리학자가 바로 이색이었습니다. 이색의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같은 대단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이 공민왕을 도와 친원파 권문세족들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이 죽고 개혁이 멈춰버리자 권력은 다시 권문세족이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신진 사대부들은 부상하고 있는 명나라를 가까이하고 원나라를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갖고 있던 각종 특권들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득권에서 그들의 주장을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권문세족으로부터 숱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정도전도 1365년 원나라 사신 접대와 관련해 정부를 비판하다가 6년간 유배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유배시절 정도전은 백성들의 고초를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현실 속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역성혁명에 대한 계획을 세워갔습니다. 인간의 완벽한 경지를 군자라고 합니다. 그런 군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은 옹졸하고 자격 없는 자가 왕으로 있기에 파생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런 패도정치는 타도해야 마땅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유배 기간이 끝나고 그는 1383년 함흥으로 갔습니다. 이성계를 찾아간 것입니다. 이성계가 있는 막사로 찾아가 그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역성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혁명파 사대부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전제개혁이었습니다. 고려는 관료에게 수조권으로 지급하는 사전과 정부에 세금을 내는 공전이 있었습니다. 고려 후기에 들어서 이 균형이 무너지고 사전이 확대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전이 공전과 겹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농민은 관리들에게도 세를 내고 나라에도 세를 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안 그래도 궁핍한 생활에 부담이 극심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농민들이 노비가 되어 버렸습니다. 노비는 재산이지 생산 계층이 아닙니다. 나라에 세를 내는 인구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민생의 파탄이 나라의 파탄으로 이어지게 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해결책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혁명파 사대부들은 사전을 혁파했습니다. 세율을 낮추는 과전법을 시행했습니다. 사전을 확대해서 권력을 누리던 기득권이 힘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방식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고충이 너무 심했기에 이런 조치는 민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혁명파사대부들은 조선을 건국한 후 유교적 법치주의와 재상을 중심으로 한 신권정치를 정착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때 조선경국전이라는 법전을 편찬했고, 자주국방을 위해 진법을 만들어서 군사 훈련을 강화했습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웠기 때문에 고려왕조와 관련된 왕족들을 유배 보내고 처형시켰습니다. 수도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습니다. 기득권의 기반이 되었던 장소를 떠나 세력의 중심을 옮긴 것입니다. 그들은 유교적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불교를 억압하기도 했습니다. 승려가 많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첩제를 실시했습니다. 도첩제는 승려가 되는 자격을 허가해 주는 제도입니다. 국가가 허락해서 승려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양인의 증가를 불러왔습니다. 세를 낼 수 있는 인구를 조정한 것입니다. 이런 급진적인 변화에 거부감을 가진 입장도 있었습니다. 왕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표방하는 정치 자체가 재상 중심의 정치였기 때문입니다. 왕권에 대한 위태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혁명의 과정에 가담했던 이성계의 아들들이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이성계의 혈연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태조의 아들들은 정도전을 믿지 못했습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역성혁명의 의의를 밝혔는데 신하가 왕에게 문제가 있다면 언제든 폐위시킬 수 있다는 내용은 왕족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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