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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조선의 건국

by 길반 2023.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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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 동북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자춘이었습니다. 이자춘 집안은 고려 무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이의방의 후손이었습니다. 이의방이 암살당하고 그의 가족은 전주로 내려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자춘의 증조부인 이안사가 동분면으로 이주를 결정하여 온 가족이 이동했습니다. 이안사가 몽골군에 투항한 후 원나라 관직을 지내면서 지역 토호로 군립했습니다. 원나라로 이주한 후에 그의 집안은 대대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얻게 된 지위를 대대로 세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자춘 대에 이르러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때 큰 콩을 세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성계의 집안은 다시 고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성계의 아버지가 죽은 후 이성계는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은 때가 스물일곱 살이었습니다. 고려에서 자리를 잡은 이성계는 변방의 시골뜨기 정도로 얕보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동북면에 사람이 없다고 함부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괘념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각을 나타내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1361년 10월 홍건적인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는지 공민왕이 안동까지 달아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이성계가 나타납니다. 이성계는 동북면 군대를 이끌고 이 지역으로 침략한 홍건적을 격파했습니다. 이성계의 군대가 승리를 잡고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한 고려군이 반격을 가했습니다. 고려는 기세를 잡고 마침내 개경까지 다시 치고 올라갑니다. 이때 입성을 할 때도 이성계가 군대의 선봉에 서서 입성하였습니다. 홍건적과의 전쟁을 계기로 고려에는 유능한 장군들이 정치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기적으로 외세의 침략이 잦았기 때문에 무인들의 역할이 더욱 부각되던 때였습니다. 이성계보다 19살 나이가 많았던 최영도 이 때 더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 대단한 장군들 속에 이성계가 있었지만 그도 이에 못지 않게 눈부신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교적 젊은 편에 속했지만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동북면을 확실히 쥐고 있었습니다. 그에겐 충성스러운 부하 장수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지란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든든한 지지자들과 함께 강력한 군대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성계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더욱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했습니다. 전쟁이라는 혼란의 상황에서 해결사로 나섰던 것입니다. 1362년에 원나라 장수인 나하추의 군대를 격파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더 나아가 1364년에 공민왕 대신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반란군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이성계가 급부상했다기 보다는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공신으로 책봉되고 고위 관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까지 그 누구도 그가 훗날의 조선 태조 이성계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유능한 장군이고 정치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그를 바꾸어놓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삼봉 정도전이었습니다. 1383년 이성계와 정도전은 함께 만났습니다. 공민왕이 죽은 후 개혁이 좌절되고 권문세족의 횡포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비관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백성들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개혁을 열망하는 세력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신진사대부였습니다. 정도전은 이 신진사대부 중 한 사람으로 개혁을 함께할 인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주목했습니다. 이성계가 강력한 사병을 갖추고 있었고 백성들의 평판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역성혁명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자신이 사상과 철학을 갖고 있으나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이성계였습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갔습니다. 이성계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군대를 정도전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대한 이성계의 정확한 반응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이후로 둘 주위로 역성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성계는 단순히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 정치인이 아닌 혁명의 중심 인물로 성장해 나간 것입니다. 

 한편 고려에 외부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기승을 부리던 권문세족이 친원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외교에 명나라 홍무제가 반감을 가진 것입니다. 명나라 홍무제는 고려에 가혹한 공물을 요구했습니다. 더불어 원과 가까이 지내지 말고 명에만 사대를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침략 이전까지 중국에 사대를 해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이를 고려는 불쾌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명의 굴욕적 요구는 명에 대한 반감이 강한 권문세족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1388년 명이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면서 우왕을 주축으로 최영이 선두가 되어 요동정벌군을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정벌군의 총사령관은 이성계였습니다. 요동 출군을 두고 최영과 이성계 사이의 입장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4불가론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출병의 선두에 세웠습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감행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는 개경으로 돌아와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성계와 혁명파 사대부는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폐했습니다. 그리고 창왕을 세우고 전권을 장악해버렸습니다. 이어 기득권의 힘을 빼앗는 과전법을 시행했습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렸습니다. 마지막까지 역성혁명을 반대하는 정몽주와 같은 일부의 사대부를 제거하고 1392년 7월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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