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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나폴레옹 시대

by 길반 2023.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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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1세와 프랑스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은 프랑스

1799년부터 1814년까지 유럽의 주도 국가는 프랑스였다. 그만큼 프랑스의 위세는 등등했다. 당시 유럽의 중심 국가는 프랑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를 주도한 인물이 나폴레옹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를 나폴레옹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에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이 프랑스의 정치 활동에 적용되어 제도화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념이 대외적으로도 퍼져서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다. 이제 혁명이라는 움직임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유럽 전역의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나폴레옹 시대는 공화정 시대와 제정 시대로 나눌 수 있다. 공화정 시대에는 나폴레옹이 제1집정관으로 있으면서 프랑스를 군사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으로 강화한 시기였다. 제정 시기에는 나폴레옹이 주로 군사력을 이용했던 시기다. 정치체제를 군사력을 이용하여 유럽 전역을 전쟁, 정복, 합병, 동맹이라는 처세를 통해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전파하고자 애썼던 시기로 해석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급장교였다. 귀족 출신 장교가 부족했던 제1공화정 때 신속하게 진급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지중해 코르시카 섬 아야키오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급귀족 출신의 가난한 법률가였다. 어머니는 거의 교육을 받지 않은 여장부 스타일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13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남자 5명, 여자 3명이 살아남았다. 그 중 나폴레옹은 둘째 아들이었다. 파리의 사관학교를 다녔던 나폴레옹은 과묵한 성격이었다. 다소 내향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학을 잘했따. 역사나 지리 서적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18세기 사상가 중 볼테르와 루소, 튀르고 같은 저자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사관학교를 나와 포병장교로 임관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배경으로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갔다. 1796년 상관의 부인이었던 연상의 과부 조세핀과 결혼하고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보두 부족한 부분이 있다. 타고났다기 보다는 언제가 자신에게 올 기회를 기다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1798년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새로이 대동맹으로 끌어들여 프랑스의 지중해 진출을 저지하려고 했다. 수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가 있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 의해 1799년 전투에서 패배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반격을 가게 러시아군을 취리히에서 격퇴시켰다. 이집트를 원정한 나폴레옹은 그 과정에서 총통부의 무능함을 마주했다 그는 1799년 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각오를 하고 돌아온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나폴레옹은 헌법개정을 했다. 이 개정을 통해 그는 그의 권한 한껏 확대했다. 나폴레옹은 10년 임기의 제1집정관이 되었다. 제1집정관은 제2집정관과 제3집정관 및 국가위원회를 임명할 권리를 가졌다. 입법기관은 양원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1집정관인 나폴레옹이 입법권까지 장악했다. 한마디로 나폴레옹 정부는 공화제를 가장한 독재였다. 나폴레옹의 독재로 프랑스 국민은 혁명의 본래 목적이었던 정치적 자유를 상실하고 말았다. 한편 나폴레옹 정부는 효율적이며 유능했다. 이 유능함은 국민들의 형편으로 드러났다. 프랑스 정부의 재정이 증가하고 농민들이 감수해야하는 세금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재판이 엄정해져서 불법적인 일이나 국가의 혼란이 감소했다. 공공시설들이 개축되었다. 국가재정의 개선은 나라의 신용을 회복시켰다. 더불어 교역량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라는 정신이 위배되는 듯하였으나 이에 대한 농촌과 도시는 질서회복과 사회안정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나폴레옹은 국내정치의 안정과 전쟁의 승리를 배경으로 1802년 또다른 헌법개정을 했다. 이 개정에서 그는 종신 집정관이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후계자 선정권까지 갖게 되었다. 이 헌법은 압도적인 다수에게 동의를 얻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성직자 기본법은 세워졌던 것 기억할 것이다. 교황청과 프랑스의 관계를 좋지 않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1801년 교황 비오7세와 협약을 체결했다. 교황은 혁명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프랑스 정부의 주교 임명권을 인정했다. 가톨릭은 프랑스 다수의 종교로 선포되었다. 이전에 선서를 했던 성직자들의 정당성은 부정되었다. 이에 일부는 반대했지만 궁극적으로 많은 프랑스 가톨리 신도에 대한 유화정책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교육제도도 개혁했다. 1800년 이전에 2만 5천명의 어린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불과한 상황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국민교육제도가 도입되었다. 프랑스 대학은 교육기관이라기 보다 교육 행정과 감독을 위한 기관이었다. 나폴레옹은 능력에 따라 출세하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의 문화적 업정 중 가장 의의를 갖는 것은 프랑스 법의 체계화였다. 나폴레옹은 법률가들로 구성되 위원회를 독려해서 1804년에 민법을 완성하도록 했다. 민법은 종교적 관용, 노예제 폐지 등 프랑스 혁명의 많은 성과를 보증했따. 그후 1806년부터 1810년 사이 민사소송법, 상법, 형사소송법, 형법 등을 추가했다. 그 가운데 민법은 가장 커다량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 뿐만 아니라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의 민법적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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