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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프랑스대혁명의의의

by 길반 2023.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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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의 의의

 프랑스 정부군은 왕당파를 진압했다. 이와 함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은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멈췄다. 프랑스에 대항하는 유럽 동맹군이 전문 용병들로 이루어져 있던 것과 다르게 프랑스 시민군은 일반 청년들이었다.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시민들이었던 것이다. 공안위원회는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795년에는 제1차 대동맹이 거의 해체된 상황이었는데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때 맺은 조약이 바젤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라이강 좌안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에 양도했다. 통치자가 폐위된 네덜란드는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바뀌고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벨기에는 병합되었고 프랑스는 라인강을 국경선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프랑스와 대치하는 국가는 영국, 오스트리아, 사르디니아가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자코뱅당 주도하의 프랑스 정부는 국민생활의 여러 면에 새 기풍을 조성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반그리스도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회는 폐쇄되었고 그동안 세워졌던 많은 성상들이 파괴되었다. 이전에 살펴본 공화력의 제정도 사실은 반그리스도교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성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기까지 했다. 이성을 무시한 맹목적이고 강압적인 하나의 왜곡된 종교적 풍토가 종말을 맞는 순간이었다. 복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남자는 귀족 차림에 반대해 나름의 새로운 형태의 바지를 고수했다. 이것이 현대 서양식 남자 바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귀족 이라는 칭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서로를 시민이라고 부르는 호칭이 확립되었다. 남녀 간에 두발 모양도 달라졌다. 여자가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는 것은 비애국적이라는 풍토가 잡혀서 배척하였다. 혁명가들의 동상이 무너진 성상을 대체했다. 혁명가들의 동상이 각 가정에 장식되었고 단두대 모형이 어린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거리 명칭에 있던 왕의 이름이나 귀족의 이름을 모두 색출했다. 이젠 혁명적 사건이나 영웅이라 칭송받는 혁명가들의 이름으로 모두 갈아버렸다. 1794년 봄이 왔다. 프랑스는 대외적으로 치열했던 동맹군과의 전쟁도 국내 분란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공안위원회를 장악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문제였다. 그는 상대당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화론자들을 숙청하고 모든 시민이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사심 없는 애국자가 되기를 바랐다. 그가 지향했던 바는 덕의 공화국의 수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또 다른 강압세력의 등장으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자유를 향한 격한 움직임 속에서 또 다른 속박을 시도하는 권력자라니. 역사를 통해 이리도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단 말인가. 역시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로베스피에르의 이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공포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의 영도권을 거부했다. 그를 체포했고 처형했다. 그가 단두대를 이용해 공포정치를 단행했는데, 결국 본인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고 시민들은 오히려 통쾌해했다. 특별히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가족들이 그랬다. 타인을 강압한 세력은 다시 돌려받게 되어있다.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세력은 언제가 부러지기 마련이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반동체제가 다시 들어서 혁명은 부르주아 중심으로 되돌아갔다. 많은 수감자들이 석방되고 로베스피에르 시대의 입법은 파기되었다. 파리 시 자치정부, 공안위원회, 혁명재판소는 해체되었다. 시민생활은 갈수록 유쾌해졌다. 마치 모든 혁명은 끝이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겉모습과 달리 내면은 환멸과 좌절감이 가득했다. 프랑스 국민은 군주제로의 복고를 원치 않았다. 시민들이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반동체제를 이끈 두 집단이 혁명으로 벼락부자가 된 계층과 왕정복고를 기피하는 국민공회 의원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국민공회가 해산할 때 법을 공포하여 새로이 소집되는 의회는 국민공회 의원 3분의 2가 다시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속임수에 격분한 파리 시민들은 1795년 10월 5일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폭동 진압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 젊은 포병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국민공회가 결정한 정부 설치령에 따라 총통 5명으로 구성된 행정부가 들어섰다. 입법부는 양원제로 선출되었다. 1795년 집권한 총통부는 무능하고 부패했다. 국내 경제사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데 대외전쟁 중 오스트리아군과의 교전은 성공적이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1796년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사르디니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프랑스군이 빈까지 올라갔기에 오스트리아는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군의 보호를 받고 있던 영군만이 버티는 상황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공격하는 의미에서 인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집트를 원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패배하고 만다. 1799년 급히 나폴레옹은 귀국했다. 그리고 11월 9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통부를 쓰러뜨리고 집권하게 된다. 10년간 유럽을 흔들어 놓은 프랑스혁명은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멈췄다. 나폴레옹은 이제 정복전쟁을 시작한다. 대외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스 이념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나폴레옹의 시대는 프랑스혁명을 끝맺는 것이 아닌 혁명의 연장선이었던 것이다. 계몽사상은 아메리카 혁명과 프랑스혁명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혁명도 자극했다. 자유, 평등, 인민주권은 유럽 전체와 남북 아메리카를 통해 커다란 호소력을 가졌다. 카리브해 연안 지역과 남아메리카에서 이 구호는 각지의 혁명을 자극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가장 성공한 경우는 아이티 혁명이었다. 아이티 혁명은 궁극적으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여러 유럽 식민지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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