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사

아메리카 합중국의 성립

by 길반 2023. 6. 27.
반응형

대륙 선언의 모습

보스턴 차 사건을 중대시한 영국은 강경책을 써서 식민지인들을 탄압했다. 1774년 영국은 식민지인들을 처벌하는 5개 법령을 발표했다. 불관용법에 따라 보스턴 항이 폐쇄되었다. 매사추세츠 주의 자치 선거도 중단시켰다. 영국 측은 앨러게님 산맥의 서쪽 지방을 캐나다에 편입시켜서 서쪽으로는 확장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영국의 조치를 식민지인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리 없었다. 1774년 전 식민주의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이게 바로 제1차 대륙회의다. 이 회의에서 식민지인의 권리와 자유 회복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본국과의 원만한 협의를 원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당시 영국 왕 조지 3세를 비롯한 영국의 세력들은 강경한 처벌을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에 있던 애국파의 행동이 사건을 크게 확대시켰다. 1775년 4월 식민지의 농민들은 동북부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근교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충돌했다. 역사가 항상 그렇든 예상치 못한 일이 큰 일의 시초가 된다. 이 충돌로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점차 식민지 내에서도 강경한 대처를 지지하는 쪽이 늘어갔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성립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는 독립선언서를 채택했다. 13주 대표는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군주권을 반박하고 영국 정부와 식민지인 사이의 불화 원인을 설명했다. 독립선언서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자유와 독립을 선언하면서 발표한 것으로 자연권과 주권재민설, 혁명권 등이 명시되었다. 모든 사람은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의 권리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정부는 피지배자의 동의에 의해서만 정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압제를 일삼는 정부는 필요 없다며 민중정부 수립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 독립선언서는 17-18세기 과학적 세계관을 반영하며 로크의 사회계약론과 자연권 사상이 포함된 내용이었다. 

1776년 영국은 결국 군대를 파병한다. 약 3만 명에 달하는 규모였다. 한편 식민지군은 능란한 워싱턴의 영도 아래 완강히 저항했다. 그들은 강력한 영국군에 전면전을 벌이기보다 주로 기습작전을 전개했다. 독립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새러토가 전투였다. 1777년 10원 6천 명의 영국군이 캐나다에서 뉴욕을 향해 공격하다가 식민지군에게 항복했다. 당시 파리에 파견되어 있던 플랭클린은 세로토가 승리를 계기로 프랑스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1778년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연이어 유럽 여러 나라도 아메리카 독립전쟁에 참가했다. 1779년에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각각 전쟁에 개입했다. 그 밖의 나라들도 영국의 급격한 팽창을 경계하면서 적대감은 보이거나 중립에 서는 입장을 보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이 중립국 선박을 수색한 것이 타국을 자극한 탓도 있었다. 갈수록 무장 중립 동맹에 참가한 나라는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의 일치된 적대행위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독립전쟁의 과정을 보면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어느 특정 국가의 독주를 막으려는 흐름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스스로 강국일지언정 독단적으로 행동하거나 타국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임한다면 결국 사면초가의 꼴이 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그 누구도 현대의 영국의 위상처럼 자리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요크타운 전투

프랑스가 식민지 전쟁에 개입했다. 그래서 7년 전쟁이 사실상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서인도에서는 영국이 우세했지만 동인도에서는 프랑스가 유리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1783년 파리조약이 체결되었다. 13주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독립이 승인되었다. 신생국가 영토는 서쪽으로 미시시피까지 남쪽으로 플로리다, 북쪽으로 오대호 지방까지였다. 그러나 플로리다 및 미노르카 섬은 다시 스페인에게 반환되었다. 프랑스는 동인도의 무역지점과 서인도의 토바고, 아프리카의 세네갈 같은 곳을 차지했다. 1778년 성문헌법으로 연방규약이 제정되어 3년 후 아메리카 각주의 인준을 받은 적이 있다. 이 규약에 따르면 각 주는 과세, 통상권, 화폐 발행권 등 독립적 권한 및 의회에서 동등한 의결권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주요 결정은 9개 주 이상의 동의를 요하며 규약수정에는 전원일치가 필요했다. 의회는 선전포고와 강화 조약 체결, 군대 보유, 인디언 문제 등에 관한 권한을 가지나 이러한 권한 수행에는 주의 재정 지원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 규약은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각 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1783년 공식적으로 종전된 후 연방규약을 둘러싸고 각 주간에 반목과 분쟁이 발생했다. 상인계층이나 부유층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충분히 보장받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규약 개정을 요구했다. 보수적 정치가들이 선도하여 1787년 5-9월 필라델피아에서 제헌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의 대표로 상공업 지역인 뉴잉글랜드 지방과 대농장 지역인 남부에서 온 부수주의자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회의 결과 각 주의 독자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강력한 중앙정부의 수립이 결정되었다. 새 헌법은 연방주의자와 주권론이 다 같이 반영된 타협의 소산이었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으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꾀하였다. 각각 의회는 법률제정, 대통령은 시행과 적용, 법원은 해석을 담당했다. 정부에게는 화폐 주조권, 관세 징수권, 외교권 등이 없었다. 상원의원과 대통령은 간선제로 선출하게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