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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프랑스 대혁명과 입법의회

by 길반 2023.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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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은 1791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다. 국민의회 의원은 정치적 경력이 없는 인사들이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입법의회는 우익과 좌익으로 나뉘었다. 우익보다 혁명을 과격하게 밀고 나가려는 좌익에 유능한 인사들이 많았다. 입법의회의 주도권은 지롱드 출신으로 된 지롱드 당에게 돌아갔다. 프랑스 정치의 대내적 진전에 더하여 대외적 관계도 복잡해졌다. 1792년 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프랑스가 내부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외적인 전쟁에까지 휘말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프랑스 내부에서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외부로 망명한 귀족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들이 국경지대에서 반혁명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는 혁명의 불씨가 꺼지기를 도모했고 대외적으로 자신들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는 활동을 한 것이다. 봉건제 폐지로 일부 독일 지방의 제푸들이 알자스 지방의 권리를 잃은 것에 대해서도 보상을 요구했다. 아비뇽 시민의 요청으로 국민투표를 진행했고 1790년 국민제헌회의가 아비뇽 시를 프랑스에 병합한 것을 두고 원래 교황령이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럼 당시 루이 16세는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을까. 지난 글에서 혁명 중에 민중들의 거센 반발로 파리로 돌아온 그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루이 16세는 파리에 갇혀있었다. 그런 상황에 절망감이 극심했을 것이다. 게다가 지롱드 당에서 왕과 왕비의 반혁명 움직임을 비난하고 나섰다. 1791년 2월 왕과 왕비는 변장을 하고 국격을 넘으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발각되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덜미가 잡힌 루이 16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루이 16세의 행동은 신뢰를 떨어뜨렸다. 민중들의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루이 16세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혁명의 맥락에서 세워진 법령들을 거부하고 인준하지 않았다. 루이 16세의 반대가 있어도 혁명은 흐름을 타고 진행되었다. 1791-1792년 비선서 성직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입법의회는 이들의 반란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비선서 성직자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를 두고 루이 16세가 거부했다. 그러다 보니 군주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인접한 국가의 전쟁도 혁명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792년 4월 전쟁이 발발한 것을 사람들은 가볍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 전쟁에 대한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두고 민중들은 왕과 왕비가 외부와 내통을 했다고 의심했다. 이제 화를 풀 대상이 결정된 것이다. 전쟁의 결과는 이기면 좋은 것이고 지면 왕의 탓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에서 진 프랑스, 군중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왕이 있는 궁으로 침입했다. 왕의 권위가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흥분한 군중들을 루이 16세는 다독였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잔을 돌리며 유혈 사태를 당하진 않았다. 시대적 흐름이 그래서 그렇지 왕으로서 자리에 있는 그의 소양은 아주 밑바닥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단편에 불과하다. 프랑스 군주제의 앞날은 폭풍 앞에 촛불과 같았다. 

군주제의 종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동맹군이 프랑스 국민에게 포고문을 보냈다. 혁명분자들을 위협하고 왕을 지원하는 그의 입장을 명시했다. 프랑스의 내부질서를 다시 잡고 왕권을 재확립할 의중이었다. 이런 내용이 담겨있는 것이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 선언은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프랑스혁명을 더욱 격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풍전등화였던 왕의 지위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고 말았다.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심각했다. 결국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극단적인 과격파와 파라의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중심이 되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파리 자치시 정부 청사는 결국 점령되었다. 왕과 그의 가족은 도망갔다. 좌익 의원들은 왕권정지를 가결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때 대표가 된 사람이 당통이다. 당통은 약 1개월 동안 활발하게 활동했다. 반혁명의 기세를 꺾기 위해서 가택수색을 벌이는 등 혐의자들을 수색하고 투옥했다. 1792년 9월 2일 파리로 통하는 관문의 함락 소식이 전해졌고 이에 증원군은 떠났다. 하루 전 팸플릿이 전 파리 시가에 돌았다. 루이 16세의 반역과 시민학살 계획이 발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투옥 중인 반혁명 혐의자들과 비선서 성직자들은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이어서 왕당파도 무차별 학살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9월 학살이다. 왕정이 정지된 후 입법의회는 능동시민과 피동시민 구분 없이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시민의 투표권을 인정했다. 국민공회는 1792년 9월 20일 첫 회합을 가졌다. 다음 날 국민공회는 프랑스의 왕정을 폐지하고 1792년 9월 22일로 공화정의 첫날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했다. 

 프랑스혁명에서 나온 공화력은 종래의 태양력이 불합리하다고 농사에 맞는 계절 이름을 붙인 역법이었다. 1주 7일제를 폐지하고 10일을 1주로, 30일을 1개월로 하고 10일마다 휴일이 있게 만들었다. 1년의 끝에 5-6일은 연휴로 상퀼로트의 날로 재정했다. 이렇게 비교적 온건한 프랑스혁명의 첫 단계가 마무리 됐다. 그것은 진보적인 귀족계층이 주도하고 재산 소유 정도와 교육 수준이 높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이 크게 반영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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