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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

by 길반 2023.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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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의 함락

 프랑스 대혁명의 직접적인 이유는 국가예산의 파탄에 있었다. 앞서 말했듯 아메리카 혁명에 지원을 이어가다 보니 재정이 불안정해진 탓이었다. 프랑스는 당시 유럽에서 인구가 많고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프랑스 농민은 다른 나라의 농민들보다 비교적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지식인이나 부르주아 계급의 불만은 날로 커져갔다. 프랑스의 정치, 경제, 사회와 관련된 모든 제도들이 그들이 보기에 너무 낙후된 것으로 보였다. 주관적인 입장이 아닌 변화하는 시대 상황과는 괴리가 커져만 갔다. 이런 제3신분의 불만도 있었지만 가장 큰 혁명의 원인은 국가 재정 파탄에서 기인했다. 프랑스 왕이나 정부가 나라의 재정적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다. 국가 재정 위기는 루이 14세 대부터 비롯되어 아메리카 독립전쟁 참전으로 더 심해졌다. 정부의 신용이 날이 갈수록 하락했다. 국채 이자율은 20%였으니 영국이 4%였던 것으로 보아 5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계속해서 정부의 부채는 늘어가기만 했다. 루이 16세는 이런 국가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세율을 낮추고 제1신분 및 제2신분에게도 과세를 시도했다. 하지만 왕비와 귀족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향유하는 권리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나라가 무너지면 유지될 수 없다는 단순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루이 16세에 대한 반발은 오히려 그를 파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후로 여러 번 재무장관이 경질되었지만 개혁은 계속해서 실패했다. 국가가 유지되려면 이렇게 세금이 중요하다. 특권계층에게만 특혜가 돌아가면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나게 되어있다. 게다가 특혜를 특혜가 아닌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국민으로서 납세의 의무를 지는 것은 건강한 재정을 확립하는데 크게 일조하는 애국이다. 

테니스코트 선서

1787년 루이 16세는 마지막으로 명사회를 소집했다. 145명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모였지만 도무지 협의에 이를 수 없었다. 결국 최후의 수단을 찾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찾은 것은 신분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신분회는 왕이나 귀족들이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을 받을 때 소집된 집단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에게 좋지 않았다. 부르주아 계급은 성장해 있었고 부당한 대우와 현실에 개선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신분회 소집은 명분을 주는 상황이었다. 이를 부르주아도 놓치지 않았다. 제3신분에 속한 프랑스 국민의 절대다수는 신분회 소집을 계기로 개회 개혁을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사항을 적어 정부에 제시했다. 요구 사항은 이랬다. 특권계급인 성직자들과 귀족들에게 적용되는 면세특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과 공평한 과세가 적용되어야 하고 이를 헌법으로 명문화하라는 것이었다. 지금에서 보면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내용이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성문화한 헌법은 정부의 무책임한 권리남용과 자의적인 집행을 막고 정당하게 재판할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이었다. 1789년 1,2 신분이 각각 3백여 명, 3 신분은 두 배에 달하는 6백 명으로 모였다. 각 신분의 대표수가 동수인 것은 3 신분에게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들의 인원이 많은 만큼 더 많은 수의 대표를 선발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들의 입장이 반영되어 배수의 대표가 모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제3 신분 대표의 절반 가량은 법률가였다. 나머지가 상인, 은행가, 정부관 및 농민이었다. 특권 계층이 아니었을 뿐 사회의 주요 대사에 대한 실무진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스스로에게 불리한 신분별 표경방식을 즉각 반대하고 양보하지 않을 수 있었다. 1789년 6월 20일 제3신분 대표들은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했다. 이를 테니스코트의 선서라고 한다. 테니스코트 선서는 절대왕권의 종말과 주권재민의 출발을 선언한 것이었다. 3일 후 루이 16세는 회의에 참석하여 각 신분은 따로 모여 회의할 것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왕이 떠나고도 남아있는 제3 신분에게 관리가 다가가서 해산하라고 얘기했다. 귀족 출신이자 제3신분 대표였던 미라보는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대표들은 국민제헌의회의 성립을 선포했다. 6월 27일 보고를 받은 왕은 대응하지 않고 물러났다. 하지만 의회가 개인의 자유, 사회적 평등, 민주적 민족주의를 목적으로 헌법제정에 착수하자 왕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왕은 반동 귀족들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 활동을 저지하고자 했다. 누구도 기존 흐름에서 떨어져서 냉철하게 사고하는 것이 쉽지 않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은 더욱 어렵다. 왕은 당연하게 누려오던 권력을 빼앗긴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마 상상도 못 할 모욕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변화는 필연적이다. 항상 자신이 최상위일 수 없고, 영원불변의 방법은 없다. 

바스티유 함락

 왕의 이런 조치를 전해 들은 민중들은 불안했다. 하지만 이들을 젊은 신문기자가 선동했다. 결국 폭동이 일어났다. 7월 14일 파리 군중은 시 동쪽 끝에 있는 바스티유를 습격했다. 바스티유의 감옥은 프랑스의 구체제를 상징하는 곳으로 민중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에는 7명의 잡법이 있었다.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정치범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흥분한 군중은 비무장이었던 스위스 수비병을 학살했다. 바스티유 습격은 군중심리에 의한 난동행위로 평가된다. 군중들의 폭력적 개입은 귀족계급의 방해공작을 분쇄하는 효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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