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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프랑스 대혁명의 발단과 진행

by 길반 2023.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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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의의

 서양사의 가장 상징적인 해로 꼽는 해가 1789년이다. 왜일까? 1789년을 기점으로 자유와 평등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본다. 인간의 움직임, 즉 혁명이 압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아메리카 혁명가들과 같이 계몽시대의 정치사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아메리카 혁명보다 더욱 급진적인 혁명을 감행했다. 아메리카 혁명 지도층이 영국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지만 영국의 법과 사회적 문화유산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했다는 한계를 가졌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지도층들은 기존 사회의 제도를 청산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구조를 세우는 양상을 보였다. 프랑스혁명은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스웨덴, 네덜란드, 스위스 등의 대중은 프랑스혁명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신들의 나라에도 개혁을 시도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19세기를 통틀어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는 무리와 새로운 흐름을 수용하려는 진영의 충돌이 이어졌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유럽의 모든 혁명 세력이 승리를 거두었다. 현대의 프랑스 대혁명이 내세운 자유, 평등, 박애라는 표어가 민주주의 체제의 근본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근대사의 출발점이다. 이 출발점을 이해는 하는 것은 19세기 역사뿐만 아니라 그다음의 역사를 이해하는 필수적인 사건이 된다. 

혁명의 발단과 진행

18세기 중반의 프랑스 사회는 중세 이래의 봉건적 잔재와 제도적 모순을 청산하지 못했다. 귀족은 농민에게 심한 노역과 경제적 희생을 강제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와 같이 프랑스의 절대주의 체제는 효율적인 체제가 아니었다. 복잡한 중앙집권적 제도의 압력으로 부패했다. 소수의 특권층이 국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과세를 피했다. 소수의 권력남용이 자행되는 모순적인 사회였다. 이런 상황에 프랑스 지식인들은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 소리를 듣지 않았다.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었지만 개선은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프랑의 루이 14세 이후로 전쟁으로 인한 국가 적자를 떠안고 있었다. 특히 아메리카 독립전쟁을 지원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정치와 경제에서 강력하고 유능한 지도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나라의 왕비는 무능하고 사치스러운 사람이었다. 

중세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사회신분은 여전히 특권층과 비특권층으로 나뉘어 심한 격차를 보였다. 재산과 교육수준이 끊임없이 향상되고 있던 신분은 제3신분층이라고 한다. 이들은 도시민으로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차별과 부정의에 분노하고 있었다. 재산은 늘어가고 자신들의 생산력과 실력은 향상되어가니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하지만 체제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으니 불만은 아래서부터 들끓었다. 현대 사회에서 이와 유사한 상황을 찾아본다면, 무능한 상사 내지는 완고하게 자신의 것만 고수하는 꼰대 문화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사실 이런 것은 강제력이 크게 작용하지 않으니 비할 바가 될 순 없다. 구체제에서는 문벌이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를 결정했다. 타고난 조건이 절대적이었다. 프랑스의 전 인구 2천6백만 중 1% 정도의 사람만이 특권층인 성직자나 귀족 계급에 속했다. 이들의 특권은 어마어마했다. 국가 토지의 반 이상을 소유했다. 게다가 고위직이나 직무에 있어서도 가장 좋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거의 모든 과세가 면제되었다. 교회 고위직은 종교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는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교회를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 유지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막대한 수입을 가진 고위 성직자는 교회 일을 하급자에게 맡기고 베르사유에서 호사를 누렸다. 호화로운 저택을 소유하고 도박을 일삼은 성직자도 있었다. 귀족들은 대부분의 중요한 과세를 감면받았다. 그들도 궁정 생활을 즐겼는데 사실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시골의 신부나 농촌의 가난한 귀족은 비특권층과 비슷했다. 그들도 혁명 당시에 특권층의 입장이었다기보다는 비특권층과 같은 입장에 처해있었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특권층인 제3신분에 포함된 사람들은 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변화의 폭이 넓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부유한 은행가, 유명한 문인에서부터 아주 가난한 농민이나 노상의 거지에 이르기까지 실로 비동질적 집단이었다. 사회가 변하면서 돈이 들어오는 경로는 다양해진다. 이런 다양한 수단과 함께 다양한 직군에서 새로운 신분이 부상한 것이다. 이 신분은 크게 중산층 이상의 부르주아 계급, 도시의 하층에 속하는 공인, 농민층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은 여전히 봉건적 부담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농민은 교회에 십일조를 내야 했고 소득세와 같은 간접세로 수입의 절반을 내야 했다. 정말 살인적인 착취다. 특히 소금 세는 프랑스혁명 전 가장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세금이다. 정부는 7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1년에 일정량 이상의 소금을 사도록 강요했다. 정부 소금은 실세의 10배 이상의 금액으로 책정했다. 그리고 소금을 강매했다. 소금세 때문에 해마다 3만 명 이상이 투옥되고 5백 명 이상이 사형을 당했다. 소금 세는 관리가 징수하지 않고 개인이나 회사가 징수했다고 하니 업자들의 횡포가 극악무도했다. 그 밖에도 농민은 고기잡이와 사냥을 할 수 없었다. 도시의 공인까지 포함된 부르주아 계급은 농민보다 훨씬 더 잘 살았고 형편도 좋았다. 법률가, 의사, 문인, 상인, 수공업자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들은 교육 수준이 높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대한 욕구가 컸다. 그들은 국가 행정의 말미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더 큰 출세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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