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따라 고려 개경으로 들어온 청년 이성계, 아버지의 죽음 이후 스스로 기반을 마련해야 했던 이성계의 승승장구와 사상가 삼봉 정도전과의 만남까지 봤는데요. 그 이후 이성계는 어떻게 역성혁명의 기반을 다져갔을까요?
우왕 6년(1380) 이 시기는 동아시아의 지배 질서가 바뀌는 시기였습니다. 원의 세력은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틈타 명이 세력을 키워나갔지요. 빈농 출신의 홍건적의 주원장이 명의 황제가 되어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고려는 공민왕 때부터 원과의 관계를 청산하려 했기에 고려조정도 새로 급부상중인 명과의 관계를 이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명이 고려에 계속 도가 넘는 짓들을 하는 겁니다.
과한 공물을 요구하고 철령 이북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겼습니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니 당연히 명의 영토에 속한다.“
이미 원나라 말 공민왕 때 수복하여 고려 땅으로 회복했는데, 이 사실을 무시하고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주원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요동 지역에 방을 붙이게 했습니다.
“철령 이북, 이동, 이서는 본래 원나라 개원로에 속한 땅이이니 여기 소속된 군인은 출신을 막론하고 그대로 요동도사에 귀속된다.”
명나라 병사들이 이런 방을 붙이고 다니자, 우왕은 이들을 처단하고 옥에 가뒀습니다. 이런 처신에 명나라는 놀랐습니다.

“철령은 우리의 땅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에 명나라에 넘겨줄 수 없다.”
”일개 홍건적 출신이었던 놈이 천자를 운운하며 고려의 땅을 빼앗으려는 도적과도 같구나!”
고려 우왕과 최영의 입장은 확고했습니다. 최영은 이럴바에 먼저 명을 치자고 주장했습니다.
“저들의 요구를 마냥 들어줄 수는 없소. 차라리 우리가 먼저 저들을 선제공격 합시다.”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요동을 칠 것이니 만전을 기해주기를 바라오.”
하지만 우왕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반대했습니다.
“아니되옵니다 전하! 요동을 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때 이성계가 말한 내용을 두고 요동정벌에 대한 4불가론이라고 하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하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지금은 농번기이니 군사를 일으키는 것에 무리가 있습니다.
왜구가 침략할 구실을 주는 것이며 게다가 장마철이니 무기 사용이 어렵고 전염병이 퍼질까 우려가 됩니다.”
우왕은 이성계의 반대를 예상치 못했습니다. 적임자라 여긴 장수의 반대의견을 들으니 심란했겠지요. 이런 우왕에게 최영은 말했습니다.
“전하 우리 고려군이 능히 요동을 정벌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자들의 말은 괘념치 마시옵소서.”
최영의 말에 자신감을 찾은 우왕은 이성계에게 출병을 명했습니다. 왕명이 떨어진 이상 출병이 불가피했습니다. 결국 요동으로 정벌군이 동원되었습니다.

요동 정벌군은 문하시중 최영이 팔도도통사로서 총괄하고, 이성계가 우군도통사, 조민수가 좌군도통사로서 구성되었습니다.
우왕 14년 1388년 4월 18일 정벌군이 좌우군이 서경에서 요동으로 출병했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이 출병에 최영은 없었습니다. 우왕이 출병하려는 최영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경이 가면 나는 누구와 정사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가겠다면 나도 그곳에 따라 갈 것이오.”
이렇게 붙잡는 우왕을 뿌리치지 못하고 최영은 개경에 남게 되었습니다. 고려사절요의 내용대로 라면 우왕과 최영의 결정적인 실수가 아닐 수 없는 장면입니다.
최영없이 요동으로 출병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요동 정벌에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이성계는 요동 정벌 자체를 반대했었으니 요동으로의 진군이 빠를리가 없었겠지요. 1388년 4월 18일에 출병한 군대는 5월 7일이 돼서야 위화도에 도착했습니다. 요동정벌군은 위화도에서 더 진군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진을 치고 5월 13일에 회군령을 내려달라고 고려 조정에 요청했습니다.
“신들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鴨江]을 건너자 앞에 큰 하천이 비로 인해 물이 넘쳐흘러 첫 번째 여울에서 떠내려가거나 물에 빠진 자가 수백 명입니다. 더욱이 지금은 덥고 비가 와서 사졸과 말들도 모두 고달픕니다. 전하께서는 군사를 돌리도록 명을 내리셔서 삼한의 여망에 응답해주십시오!"
우왕과 최영은 정벌군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환관 김완을 보내 멈추지 말고 진격을 할 것을 독촉했지요.(1388년 5월 22일)
그러던 중 병영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성계가 친병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위에 올랐다.’
이 말을 들은 조민수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이성계가 군사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혼자서 요동을 정벌하거나, 개경으로 회군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릴테니까요. 조민수는 울상이 되어 이성계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이성계는 그를 진정시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치를 따르는 것[順]과 이치를 거스르는 것[逆]으로써 상서(上書)하여 군사를 돌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살펴보지 않고 최영은 또한 노쇠하여 듣지를 않으니, 어찌 경들과 함께 왕을 뵙고 친히 화와 복을 아뢰며 왕 곁의 악한 자를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히 하지 않겠는가.”
“장군 나는 이치에 맞게 군사 돌리기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소. 이에 나는 전하 곁에서 떼어내어 이를 바로 잡으려하오.”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던 이성계는 결국 군대를 돌리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우리 동방의 사직(社稷)의 안위가 공의 한 몸에 달려 있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그는 군사를 돌려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습니다. 현장에 있던 최유경이 개경으로 달려가 고려 조정에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전하 북벌군이 왕명을 거부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했습니다!!”
고려조정은 아연실색 난리가 났습니다.
“정벌에 나섰던 여러 장수들이 멋대로 군사를 돌렸다. 너희 크고 작은 군사와 민(民)들이 마음을 다하여 방어한다면 반드시 크게 상을 줄 것”이라며 전국에 인원을 모집했지만 적합한 인원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성계의 회군은 차분하고 여유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성계는 서두를수록 인명피해가 많아질 것을 걱정하여 회군 도중 사냥까지 하며 진군 속도를 늦췄을 정도였죠. 병사들에게도 당부하길
“너희가 만약 백성들의 오이 한 개라도 빼앗으면 마땅히 죄를 받을 것이다.” 고려사절요 5월 22일
라며 엄하게 당부했습니다.

1388년 6월 1일, 이성계는 개경에 도착했습니다. 숭인문 앞에서 진을 치고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성계는 병력을 보내(유만수) 숭인문을 공격했고, 조민수 쪽의 좌군은 선의문을 공격했지만 모두 최영이 막아냈습니다.
이 패배로 회군 병력들이 동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이성계가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데요. 돌아온 패전 소식에도 이성계는 묵묵히 누워있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식사를 마친 후, 말위에 올라 군사를 정돈했습니다. 출발 전 이성계는 활을 들고 작은 소나무를 조준했습니다. 그리고 명중.
이성계는 선죽교를 거쳐 남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남산에서 최영의 장수인 안소가 있었고 안소의 군사를 진압했지요. 그 사이 최영은 우왕과 영비를 데리고 궐내 팔각전으로 피신했습니다. 하지만 금방 포위되고 말았죠.
(병사들 최영을 내놔라! 최영을 내놔라!)
최영은 모든 일이 끝난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궁지에 몰린 그는 우왕에게 두 번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를 포위한 병사들 가운데 이성계와 마주합니다.
자신의 앞으로 나온 최영에게 이성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 이런 사변은 내 본심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에 닿은 까닭 때문입니다. 잘 가십시오, ”
“일찍이 이인임이 그대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기에 설마했는데 그 자의 말이 맞았구나”
명을 치기 위해 편성되었던 정벌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
고려의 수장, 최영이 축출되었습니다. 최영은 합표로 유배되었고 나머지 그의 일파도 모두 유배 되었습니다. 이성계가 감행한 위화도 회군이 최영과 우왕을 축출한 것으로 성공했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있었습니다. 여전히 고려의 왕족과 기득권이 남아있었고, 명분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실세가 이성계와 혁명파 사대부에게 넘어왔습니다. 이일로 이성계는 우시중에 오르게 됩니다. 함께 요동정벌군으로 출병했던 조민수는 좌시중이 되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이 조선 개창의 발단이 되긴 했지만, 이성계가 바로 조선을 세우고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닙니다.
아직 고려의 왕족과 기득권이 남아있었고, 명분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실세가 이성계와 혁명파 사대부에게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이성계와 정도전의 조선왕조 개국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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