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수의 유배 이후 ‘김저 사건’이 일어납니다. 김저는 최영의 친적이었는데요. 이 김저와 정득후라는 두 사람이 폐위되어서 여주에 있는 우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우왕과 함께 다시 왕위에 오르기 위해 모의했다는 사건이지요. 우왕과 함께 이성계를 암살할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려다가 실패했다는 내용인데요. 정득후는 그 자리에서 자결했고 김저는 잡혔습니다. 이 김저를 국문한 끝에 받아낸 자백이 반대파 처벌과 창왕의 폐위의 명분이 되었습니다.
김저 사건으로 우왕은 여주에서 강릉으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혈통이 아닌, 공민왕의 책사인 신돈의 자식이라는 폐가입진 논리가 대두되었습니다. 공민왕의 혈통이 아닌 우왕과 창왕이 왕이 되었으니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결국 조민수와 온건파에서 옹립한 9살의 어린 왕 창왕은 폐위되었습니다. 그리고 급진혁명파에서 45세의 정창군을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그는 왕 씨 고려 왕족의 혈통이긴 했지만 고려 20대 임금 신종의 7대손으로, 왕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왕위에 앉힌 것은 왕위의 인계가 수월할 수 있도록 계산된 결정이었겠지요.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온건파에서 역이용했습니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저격하기 시작한 건데요. 이성계에 반대하는 간관들과 함께
정도전에 대한 탄핵상소를 올렸습니다.
공양왕 3년 1391년 9월
“”전하 정도전은 가풍이 부정한 자입니다. 그의 출신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음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탄핵상소에 공양왕은 고민하는 듯 싶었으나,
이내 정도전을 직위에서 탄핵하고 유배를 보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두 아들의 관직을 빼앗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버렸습니다.
이 탄핵 상소로 정도전과 정몽주는 완전히 틀어집니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유배시키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를 처형해야 한다고 강하게 공양왕에게 주장했지만 공양왕이 그것까지 받아들이진 않았지요.
자신들의 뜻으로 옹립한 공양왕이 이성계의 최측근인 정도전을 치는 것을 보고 급진파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자신들이 허수아비로 세운 공양왕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양왕이 고려 왕위에 오르면서 명나라에 보낸 세자인 왕석을 보냈는데, 공양왕 4년 1392년 3월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러 이성계가 황해도로 향했습니다. 이성계는 황주에서 세자를 맞이하고 해주에서 사냥을 했는데 이때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한 겁니다. 안 그래도 정도전의 유배와 정몽주의 맹공격으로 위기에 처했는데 역성혁명의 수장인 이성계가 사고를 당하니 진영 내 위기감이 고조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명나라에서 세자 왕석을 반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요동정벌을 감행했던 우왕의 계열이 아니었으니 안도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정도전은 유배가 되어있고 이성계는 몸져 누워있는 상황에 자신들의 세운 공양왕의 세자가 금의환향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성계는 말에서 떨어진 사고로 벽란도에 드러누워있는 상황이었죠.
정몽주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세를 몰아 이성계 일파를 공격합니다.
“전하, 조준, 남은, 남재, 윤소종 등의 직첩과 공신녹권을 회수하시어 그 죄를 다스리옵소서.”
이에 공양왕도 허락하여 조준을 귀양보내고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은 관작을 삭탈한 후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 이성계는 개경에 없었습니다. 벽란도에 누워있으니 상황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 흐름대로라면 정몽주와 온건파의 승리가 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혜성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이방원입니다.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훗날 조선 3대 왕, 태종이 되는 인물입니다.
“아버지, 지금 아버님의 사람들이 모두 유배되고 처형당하기 직전입니다!
어서 개경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분명 정몽주가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겁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대답도 않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원은 간절히 청하였고 결국에는 이성계를 견여에 태워 밤새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공양왕과 정몽주는 깜짝놀랐습니다. 이성계가 개경에 없는 사이 형세를 뒤집으려는 심산이었는데, 흐름이 끊겨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정몽주는 대범하게 행동했습니다. 1392년 공양왕 4년, 4월 4일에 정몽주는 개경에 돌아왔다는 이성계를 직접 만나러 나선 것이지요. 심지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려 도모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자신을 찾아온 정몽주를 여느 때와 같이 맞이했습니다.
이성계의 상태를 확인하고 안부인사를 마친 정몽주가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이방원은 그의 가신인 조영규 외 몇 명을 정몽주를 좇게 했습니다. 이들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쇠도리깨로 내리쳐 살해했습니다.
정몽주의 죽음으로 고려의 명맥을 잇고자했던 마지막 기둥이 무너졌습니다. 공양왕을 비롯한 온건파가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정도전과 조준 공격에 선봉장이었던 김진양이 자진 폭로하기를,
“정몽주를 비롯한 무리가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진 이때 조준 등 그의 우익들을 제거한 후 다음 일을 도모할 것이라 했습니다”
가담자였던 김진양이 폭로를 하니, 공양왕은 부인할 수도 없었겠죠. 이번 일을 주도했던 정몽주 계열의 인사들을 먼 지방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방원은 정몽주를 참수하여 저자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거짓된 일을 꾸미고 대간을 꾀어 대신을 해치려 했고 국가를 어지럽혔다”라는 죄목을 적어 방에 내걸었습니다.

이방원이 개입하면서 형세가 급격하게 역전 된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몸져누워있는 이성계를 견여에 태워오는 실행력이나, 명망 높은 정몽주를 제거한다는 결정을 하기까지 결단력과 실행력에 있어서는 분명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정몽주가 죽으면서 사실상 고려의 명맥은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고려를 옹호하는 온건파는 모조리 축출되었고 고려 공양왕 마저 이성계에게 동맹을 맺자며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죠.

이제 고려라는 문이 닫혔습니다. 이젠 새로 들어갈 문을 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성계와 역성혁명파는 어떻게 조선이라는 새로운 문을 열었을까요?
'더조선 The Jose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실록 EP4] 조선의 개창 - 태조 이성계 삼봉 정도전과 급진개혁파 (0) | 2023.11.30 |
---|---|
[조선왕조실록 EP2] 위화도 회군- 태조 이성계 | korean history joseon dynasty (0) | 2023.10.30 |
[태조 이성계] 노을지는 고려와 새 왕조의 태동 (1) (0) | 2023.08.24 |